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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Oct 14. 2021

14. 잘 지내지?

라는 사장의 문자.



저야 물론 잘 있죠. 사장님은요?





실제로 초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하늘과 땅 사이에'-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셰익스피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무리들이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슈뢰딩거의 고양이> 중.



*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어제 새벽 '이상한 곳에서 일한 적이 있다'를 후련하게 털어버리고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앉아있던 출근길에 싱가포르 가게의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고 있냐는 상투적인 인사 문자다. 사장은 퇴사를 앞두고 내가 보낸 장문의 사과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끊고 출국을 하고, 자가격리가 끝나고 취업을 하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한 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던 사람이다. 어렴풋이 이제 두 번 다시 볼 일 없겠구나 생각만 했다. 지구 어디에선가 다시 마주치면 그것은 그거 나름대로의 악몽일 거라고. 잘 지내지? 액정에 비치는 한마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약을 잘못 먹었나? 무슨 꿍꿍이 속이 있나?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사장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적어도 뼛속까지 호구 천치는 아니라는 것을. 사실 이 사람은 나에게 꽤나 잘해주었다는 것을. 살아간다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서 선역과 악역이 한 인물 속에서 뒹군다. 나는 사장이 더 나쁜 놈이기를 바랐지만 그는 슬프게도 나랑은 다른 각도기로 세상을 보는 사람일 뿐이었다. 많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개그와 비속어를 좋아하고, 징 박힌 뾰족구두와 고간이 찡기는 스키니 진을 즐겨 입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옳다 그르다 함부로 정의 내릴 수도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 '이런 곳'이었으면 계약하지 않았을 거라고 눈을 똑바로 뜨고 대꾸하는 나에게 순순히 미리 말하지 않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가게 안에서 여성을 옆에 끼고 노는 손님들의 태도와 언행에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입사 선물로 침대보와 베개 커버를 사주기도 하고 끼니가 고플 때 푸짐한 재료를 넣은 부대찌개를 끓여주는 천진하고 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애교도 많고 정도 많아서 '가족 같은' 가게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나는 사람 사이에 선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당신과 나는 영원히 사장과 직원의 관계일 것이며, 편한 오빠 동생 사이가 될 일은 없을 거라는 나의 말에 속상한 티를 팍팍 내던 얼굴이 기억난다. 그렇다. 그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인연이었을 뿐이다.  나는 평생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세계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놀아보았고, 말도 안 되게 많은  생각들을 했다. 서비스직과 마찬가지다. 줄줄이 나열된 지식과 이론들이나 구색을 맞춰 따는 자격증보다도 삼개월간의 실무 경험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책 속에 있는 것들은 내 것이 아니다. 계속 눈을 돌리고 발을 구르며 하늘과 땅 사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것들이 다져져 내가 살아가는 삶이 된다. 내가 체득한 모든 것이 인생이 된다.



사장은 내가 보고싶다고 말했다.


나도 말했다.


저도요.



그래, 결국 완전히 미워할 수는 없는 건지도 모르지.

그럴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지.


이런 것이 다 인생일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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