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뿐인 게 말이 되나?
동생과 성소수자 부모연대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을 보았다. 나처럼 칠렐레 팔렐레 사랑에 별 미련이 없는 사람이 보면 적잖이 찔리는 영상이다. 자신을 생각하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분투해 본 적이 있었나.
영상에는 여성의 성별로 태어나 남성으로의 성전환을 진행 중인 출연자가 등장한다. 그는 남성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남성기를 달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성의 삶이 견딜 수 없어 가슴을 절제하고 남성호르몬을 맞는다. 법원에 제출할 성전환 서류를 작성하며 남성기를 이식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세상이 말하는 남성과 여성이란 뭘까? 그는 긴 머리와 나풀거리는 치마와 핑크색으로부터 도망쳐서 이 자리에 왔다고 했다. 만약 사회가 우리에게 남자아이에게는 파란 로봇을 쥐여주고 여자아이에게는 분홍색 요술봉을 쥐여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나는 영상을 보며 생물의 성은 무수히 다양하고 분별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이 남성과 여성밖에 없어서, 그 외의 범주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각자의 빛나는 취향들을 남성과 여성의 모양에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의 머릿속에는 슬프게도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선택지밖에 없기 때문에 세상 무엇을 보더라도 그 둘 중 하나에 속하지 않으면 배척하고 두려워한다고. 남성과 여성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테스토스테론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덜렁거리는 남성기는 원하지 않을 수 있다. 고추와 성긴 털이 싫지만 부푼 가슴과 긴 머리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시대는 사람이 어느 한 성별에서 도망치면 반대쪽의 성별과 마주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특별한 무언가를 타고났는데, 세상이 준 것 중 더 싫은 것에서 빠져나오려면 그것보다 그나마 덜 싫은 성별을 선택해야 한다. 얼마나 억울하고 짜증스러울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마음에 들지 않는 색깔의 장식을 저것보다는 낫다는 이유로 걸치고 다녀야 하는 마음은.
나는 트랜스젠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다. 근래 어떤 집단에서는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을 '다 섞어먹는다'는 의미의 '쓰까페미'라고 부른다고 한다. 성별을 바꿀 결심을 한 사람들이 조금의 모욕이라도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누구도 정체해주지 않을 나의 정체성에 제 삼자가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몸과 마음의 합치는 행운 같은 일이다. 시시각각 변하고, 교육에 따라 달라지고, 체념하고, 포기하는 과정에서도 확신이 드는 것이다. 나의 성별은 다른 바구니에 들어있구나, 하는 확신이.
다큐멘터리 속 성전환자의 법원 제출 서류에는 긴 머리와 치마와 분홍색이 싫었다고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여성은 기필코 긴 머리에 치마를 입고 분홍색 옷을 입어야 하는가? 그럴 리 없다. 그 사람은 법원에 호소할 주제를 그렇게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성에게 따라붙는 온갖 꼬리표와 스테레오 타입을 부정하고, 싫어해서 그것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질 수 있는 '남성'의 지위를 따내는 것을 목표로 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사회에는 남성과 여성 외의 성별이 없기 때문에. 그 역시 서류에 이러한 말을 써내야만 한다는 것에 괴로워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못 해서 여성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말을 적어야 '이성애자 남성'으로의 성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로 인간은 사회가 정해둔 성별 속에서 불편하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정체성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가짓수를 늘리고 몫을 더해야 한다. 세상이 결코 남자와 여자로만 이루어져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은, 눈부신 진화의 이론이 증명하고 있다. 성별 이분법의 폐해는 가부장의 몰락으로 끝이 난다.
나는 남성도 사랑해보고 여성도 사랑해 보았다. 진한 연애도 해봤고 가벼운 연심도 있었다. 지금은 사랑타령을 하지만 감히 '사람'을 만날 자신이 들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를 만날 바에야 평생 혼자 살며 마음 편하게 나 자신만 괴롭히고 나랑만 살고 싶다. 사람은 변한다. 사랑이 아무리 좋았어도, 선뜻 할 자신이 들지 않는다. 나는 이성애자였다가 양성애자가 되었고 지금은 어쩌면 무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섹스가 하기 싫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인간이라면 상호 연애관계에 이루어질 모든 성적 접촉이 하기 싫다. 마음에도 없다. 이런 애매한 성욕을 가지고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도 벌거벗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연애를 꿈꿀 수 있을까? 나는 자발적인 에이섹슈얼일까, 섹스를 연애의 필수로 구성함 사회문화의 슬픈 희생자일까? 지금 나의 정체성은 또 구만리 꽃밭에서 헤매고 있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섹스가 소스라치게 싫다. 앞으로 나의 행보 역시 궁금해진다. '요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서른 살의 애인 없는 여성이 될 날이 바로 코 앞이다. 사별이나 이혼이 아닌 애인 없음일 뿐이라는 게 좀 재미가 없기는 하지만, 아직 별 웃기는 일이 많이 생길 여지가 있는 나이다.
세상에 없던 성을 발굴해야 한다. 내가 그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성별일 수도 있다. 여자와 남자 중 그 무엇도 아닌, 그 외의 수백수천 가닥의 정체성 중 하나만 제대로 찾을 수만 있어도 나는 만족한다. 핑크와 파랑, 로봇과 바비인형 사이에 갈팡질팡하지 않을 세상이 도래할지 모른다. 아무도 나를 '쓰까페미'라는 묘하게 기분 나쁜 명칭으로 부르지 않을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나는 트랜스젠더를 지지한다. 온 마음으로, 의심 없이.
나에게는 그들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삶이 나의 삶에서 요구되는 만큼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모든 인류에게도 말이다. 자신의 몸이 원하는 바와 지향하는 성적 쾌락, 성적 만족을 또렷이 알면 성별이 두 개뿐일 리 없다. 세상 사람들이 각자 하나씩의 성 정체성을 쥐고 살았으면 좋겠다. 최상의 성감과 딱 맞는 파트너를 가지고. 혹시나 파트너가 없더라도 차별 없고 편견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거다. 한없이 자유롭게, 더없이 찬란하게.
당신의 성별,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확실해요?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하고 있어요? 나만해도 서른 살 전에 정체성이 세 번이 바뀌었는데, 정말 남자와 여자, 그 두 개로 충분하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누구도 불쾌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적 행복을 찾아다닐 욕구가 있다는 것을. 왜냐면 성생활은 행복해야 하니까!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존재할 이유조차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