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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ug 08. 2022

부모를 죽이고 싶었던 적 없으세요?

그거 참 신기하네.


엄마 아빠를 아주 사랑하는 딸이 쓰는 글





나는 제왕절개로 태어났다. 나보다 한 뼘이 작은 엄마의 몸 안에 내가 들어있었다. 자식은 낳지 않을 생각이다.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낳아놓은 것이 커보니 나 같은 인간이면 그건 또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어릴 때는 숨을 제대로 쉬어본 기억이 없다. 유치원 대신 연기 학원을 가서 7년 동안 아역배우 생활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엄마 아빠의 폭언과, 주변 어른들의 싸늘한 시선과, 동료 아역배우들과의 다툼과,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모멸감, 그리고 돈 몇 푼에 사고팔리는 인간군상들 뿐이다. 그때 엄마는 나를 촬영장에서 까불면 때리고, 대본을 못 외우면 때렸다. 촬영이 끝나면 나 때문에 엄마가 힘든 거라고 아빠에게 맞았다. 내가 말을 안 듣는 아이였던 건 확실하다. 나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고, 세상이 신기했고, 다들 나에게 뭔가를 하면 안 된다는 말만 하는데 그게 듣기 싫었다. 나보다 어린 아역배우에게 누나답게 굴어야 한다는데 그래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기분이 나쁜데 왜 남의 기분을 생각해줘야 하지? 그럼 나의 기분은 누가 챙겨주지?

그래서 나는 나 하나는 끝내주게 잘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나를 세상에 꺼내놓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학창 시절 내내 아역배우라는 꼬리표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믿었던 친구들이 안티카페에 가입해 내 험담 글을 작성하고, 연예계에서 튕겨 나온 나에 대한 소문이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지 확인했던 경험은 유의미했다. 인간의 악의는 굉장한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무심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고될 것 같았다. 좋은 훈련을 일찍 받았고, 나는 지금도 타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아닌 것들은 모두 남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의 엄마는 남이다. 엄마는 지금도 그 말을 들으면 상처받은 얼굴을 한다. 그래서 세 번씩 말한다. 엄마는 남이야. 엄마는 내가 아니야. 엄마는 남이야. 우리는 다른 몸을 써. 엄마는 남이야. 나랑 한 몸이 되려고 하지 마.


연기를 그만두고 나서는 다른 쪽으로 숨이 막혔다. 엄마는 내가 영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과학과 수학으로 우수한 두뇌를 가져서 엄마와 아빠를 가난의 늪에서 구해주기를. 웬걸, 나는 수학에는 잼병이었다. 수학학원을 서너 개씩 다녀도 나는 루트와 함수를 이해 못 했다. 계산하지 않아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데 기호와 숫자로만 말해야 한다는 게 성미에 맞지 않았다. 엄마의 집념은 어마어마했고, 폭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성적을 잘 받아야 했지만 내 성적은 늘 중간을 겨우 엇돌았다. 맞는 게 지긋지긋하다. 커갈수록 회초리고 뭐고 발이며 주먹을 쓰는 일이 잦아졌다. 아픈 게 싫었던 나는 중학교 삼 학년, 학원 선생님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 모든 문제집의 답지를 베꼈다. 성적표를 위조해 1등급 종이를 만들었다. 엄마가 정말 몰랐던 건지, 그냥 나를 때리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중학교 때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중 <그 가을의 사흘 동안>과 <꿈꾸는 인큐베이터>를 좋아했다. 소파수술을 하는 여의사와 아들을 낳기 위해 여아를 낙태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나는 그때 세상에 있지도 않은 것들을 없애버리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아예 태아일 적부터, 뱃속에서부터 세상과 만나지 않아도 되는 여지가 있었던 이야기들을. 내 나름대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정리했다. 부모는 나의 편이 아니며, 내가 속한 가족 안에서 나는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의 살을 물어뜯었고, 칼을 들어서 방어했다. 엄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렸다. 열 여섯살 때였다. 나에게 힘이 생기고 목소리가 생기자 우리 집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으로 찢어졌다. 아빠는 아빠의 직장 근처에, 엄마는 고향집에, 나는 학교 옆에, 동생은 외딴 자취방에. 그리고 나서야 평온함이 찾아왔다. 그보다 안전할 수가 없었다. 한 달에 한 번도 연락이 오가지 않았고, 어쩌다 연락하면 애정이 담뿍 담긴 안부를 물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안부를, 진짜 가족 같은 목소리로. 모든 문제는 얼굴을 안 보면 해결되는 거였다. 여태껏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사람들끼리 억지로 붙어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내가 화가 났던 만큼 힘들었겠구나. 반가우면서도 이상한 평화였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피곤한 일이었다.


엄마한테는 꿈에 그리던 화목한 가정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회의를 연다며 냉랭한 분위기에서도 네 가족을 식탁에 앉혀놓았던 것이나, 형식적인 생일파티며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면 우습고 슬프다. 그림책 동화 속에 나오는 예쁜 엄마와 자상한 아빠, 말 잘 듣는 자식들이 있는 그런 꿈을 꿨겠지. 이제는 그런 사람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자식이 착한 짓을 하지 않을 때면 착하게 될 때까지 고쳐놓으려고 하니까.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멀쩡한 성인이 되어서 결혼한 남편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데, 하물며 막 태어난 새끼 인간이 원하는 대로 자라 줄리가 있나. 엄마 같은 사람에게는, 아빠 같은 사람에게는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당신들이 멋대로 만들어서 낳아놓은 것은 가족놀이 인형놀이를 하기 위한 소품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증오하고 기억하고 한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식은 언제까지고 부모라는 이름하에 휘둘리지 않는다.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충분히 알았다. 그렇게 억울하고 서러워서 나를 낳은 게 힘든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런 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보다 이십여 년을 더 살아왔으면 날 이끌고 가르쳐야지 두들겨 패고 내 탓을 한다고 뭐가 해결되나. 그래서 물었다.

누가 낳으래? 왜 낳아서 나한테 이래?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때렸다면 나는 일찍이 엄마를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지금 아빠와의 관계가 호전되어서 다행이다)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사랑이다. 내가 아니었어도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 누구라면 다 받게 될 집착. 내 몸과 나의 뇌로 이루려는 엄마의 욕망, 목적, 돈과 명예. 내가 아역배우를 하지 않았다면, 어학연수를 가지 않았다면 우리 집은 서울에 아파트 두 채가 있을 거라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한다. 내 몸뚱이 하나에 들어있는 두 개의 서울 아파트가 엄마의 사랑이다. 엄마가 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스스로 돈을 벌고 삶이 버거운 지금에 와서야 어리고 몰랐던 엄마가 안쓰러워졌다. 여자가 남자를 사귀면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고 역성 내는 할아버지와, 스물한 살에 덜컥 아이를 가져 얼굴 반반한 미남과 결혼식장에 들어선 엄마. 주판과 암산에 능하고,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다던 꿈 많고 욕심 많은 엄마. 엄마와 섹스 얘기를 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엄마, 섹스를 하면 엄청 기분이 좋고 행복해.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나는 섹스를 하는 게 좋아. 엄마는?


엄마는 한 번도 좋은 적 없었어. 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냥 했어.


엄마와 나 사이에는 얇지만 깊은 강이 있다. 엄마의 삶에서 나와 같지 않았던 무수한 것들에 이제 와서 화가 드글드글 끓는다. 엄마와 나와 동생의 이야기가 세상 위에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가 된다. 나를 사랑하는 엄마가 힘에 부치지만 이제는 엄마도 나이가 들고 나도 넉살이 생겨서 더 많이 사랑을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어떻게 이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는지 나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의 기억에서 좋았던 일은 거의 없고, 강렬한 것들은 아직까지 간직했다가 글로 쓰고 있다. 나는 평생 글감이 떨어질 일이 없다. 별로 길지도 않은 인생에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었다. 다 나의 부모 덕분이다. 화가 나는 것을 화가 난다고, 거지 같은 것을 거지 같다고, 부당한 것에는 참을 수 없도록 만들어준 나의 가정환경 덕분이다.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이십오 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이혼이 있었고, 일탈이 있었고, 반항이 있었고, 자유가 있었다.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으로만 불릴 때 우리는 행복해졌다. 이십오 년, 성질 다른 네 사람이 균형을 맞춰 불화 없이 대화하기에 필요한 시간. 이혼한 남녀에게는 나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테고 네 살 어린 동생은 나보다 조금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나는 동생의 화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 부모를 사랑한다고 그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에게 상처 입힌 것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에 대한 악으로 깡으로 마저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죽음 앞에서도 생각날 것 같은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을 가진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목소리를 내고 글을 쓴다. 뭘 모르던 어린 부모가 저지른 죄는 그렇게 기록되고 곱씹어진다. 이런 생각하면 번식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 말 좀 잘 들을 법도 하고 내 몸에 담았으니 원하는 대로 좀 자라줄 법도 한데 하나부터 열까지 쉬이 지나가질 않는다. 심지어 사는 게 바빠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일을 죽어도 잊지 못하는 자식이라니.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맞은 것만 기억하는 자식이라니!


아역배우를 하게 됐던 날이 기억난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여섯 살 내가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하는 동요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엄마는 부엌 쪽에서 나에게 물었다.


"해인이 티비 나가고 싶어?"


"어."


분명히 그날이 시작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역배우를 하고 싶어서 시켰다고 굳게 믿는다. 일곱 살. 정말 자기 결정을 잘할 나이. 아이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알고 있을 나이.

아역배우를 하면서 엄마는 매니저도 없이 바쁜 스케줄을 직접 관리했다. 엄마에게도 적잖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벌거벗고 쫓겨난 일과 대본을 외우며 울었던 기억밖에 없지만 엄마는 지금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에게 물어본다.


"재미있었지? 너 아역배우 한 거 너무 좋은 추억이지?"


음, 아마 엄마에게만 그럴 것이다.


나에게는 네 살 터울 동생이 있다. 엄마는 지금도 동생의 얼굴을 보며 웃는다.


"네가 얼마나 동생이 갖고 싶다고 졸랐던지. 정현이는 너 때문에 낳은 거야. 언니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걸."


내 나이 네 살. 부모의 자녀 계획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나이. 동생이 갖고 싶다고 말하면 부모의 성생활에도 관여할 수 있는 나이. 엄마가 쉰다섯이 되었어도 동생의 탄생은 내 탓이다. 그것도 임신 7개월 만에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듣고 지우기엔 너무 늦어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던 내 동생.

엄마는 지금도 나와 동생을 때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때린 것은 아빠고 엄마는 말렸다고 말한다. 아니, 엄마는 어떤 때는 방관했고 어떤 때는 직접 때렸다. 일곱 살의 나 때문에 연기를 시작했고 네 살의 나 때문에 동생을 낳은 것처럼 이번에는 또 아빠 탓을 한다. 엄마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을 탓하지 않고는 연명할 수도 없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분신이다. 엄마가 내 입에서 남이라는 말을 들을 때 배신감에 찬 눈을 하는 것을 이해한다. 나는 엄마가 살고 싶어 하는 삶을 대신 살고 있으니까. 엄마가 내주는 학비로, 월세로, 생활비로 사랑과 연애를 실컷 해보고, 하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으면서 산다. 하지만 결국 나는 엄마가 아니다. 엄마의 대신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나와 한 몸을 쓰고 싶었던 엄마는 지금 나의 옷자락 끄트머리나 간신히 잡고 있는 꼴이다. 남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내 나를 놓지 못한다. 나에겐 엄마가 가져야 했던 아파트 두 채가 들어있으니까.

나는 비혼무자녀주의 양성애자 여성이다. 나는 결혼하지 않는다. 후회도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을 망설이지도 않는다. 비위 맞추지 않는다. 싸우고 짖어댄다. 개처럼, 짐승처럼.

반동처럼 엄마가 바라는 방향과 정반대로 살고 있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 이것이 내 삶이다. 내 삶! 숨통이 트이는 나의 삶.

내가 행복한 인생을 찬미하고 있으면 엄마는 뿌듯하다는 듯이 나를 본다. 엄마,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


"너네가 내 인생이야."


맞다. 끔찍할 만큼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엄마, 우리는 남이야. 나는 우리가 남이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지금 우리가 그나마 이 정도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어리고 몰라서 자식을 낳은 게 엄마의 죄는 아니지만 어리고 모르는 사람한테 태어나서 이렇게 자란 게 내 죄도 아니다. 엄마와 나는 찜찜하게 사랑하면서 산다. 질척이며 질색하며 그렇게 산다.

그래서, 부모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정말 없었어요? 그거 참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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