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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30. 2023

Washington 07. 네가 자위하는 모습을 보는것

예술이란!

드가는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어쨌거나 예술은 일종의 소통이며, ‘개인의 표현’은 표현된 것이 관객의 심금을 찾아 울릴 때만이 영화적으로 흥미롭다. 소통에 성공하는 예술과 그렇지 못한 예술을 경험하는 것의 차이는 상대와 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과 상대가 자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 중


*


오늘은 워싱턴 디씨 한가운데 있는 국립 미술관에서 심호흡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부터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쇠라와 모네, 고흐에서 세잔까지. 숨을 쉬는 기분, 숨을 아주 크게 들이쉬는 기분. 너무 오랫동안 미술관 밖에서만 생활했더니 좋은 작품을 마주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잊고 있었다. 뇌가 팽창하듯 욕심을 부린다. 두개골 속이 공기정화식물을 들여놓은 것처럼 말끔하다. 그 옛날 짝사랑했던 것들이 보란 듯이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감히 넘볼 수도 없게 눈부신 자태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좋아하는 미국 작가다. 어쩌면 이렇게 삐딱하면서도 첨예하면서도 노곤하게 쓸 수 있는지 당장 달려가서 물어보고 싶다. 대부분 글을 보면 작가가 보인다. 이 사람이 쓰는 글은 유리 한 겹도 씌우지 않은 작가 그 자체다. 모슬린 한 겹도 겨우 걸쳐놓은 정도라고 해야 하나. 겨드랑이 털까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적나라하다. 대마초와 김 빠진 맥주냄새가 환각처럼 코에 맴도는 문장들. 거북할 법도 한데 그가 쓰는 글을 읽을 때마다 나까지 글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난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동하게 할 수 있는 건지 놀라울 따름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번 나를 글 쓰게 했다.


데이비드 월리스의 예술에 대한 정의도 나를 글 쓰게 한 문장 중 하나다. 작품은 혼자 있을 때 작품으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 봐주고 감상해 주고 찾아와 줘야 가치가 생긴다. 가치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작가는 늘 보는 이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디까지 보여주고 싶은지. 작품은 그 과정에 사용되는 번역기다. 작가의 능력이 좋아 성능 좋게 완성되면 관객은 작가의 무성언어를 꽤 알맞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고, 좀 거친 쪽을 선택했다면 잡음은 좀 있더라도 뭔가 전달되긴 할 것이다. 이 과정을 상대와 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상대가 자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비유한 게 참 그 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오늘 꽤 좋은 섹스와 유사한 쾌감을 느끼고 온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구경한 수많은 자위쇼들을 추억한다.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았던 누군가의 고장 난 번역기들. 이 에세이에서는 주구장창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붙잡고 쓰고 있지만 현대미술이나 근대 미술이 주제였다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또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을지 궁금해진다. 그가 보기에 벽에 흩뿌려진 잭슨 폴록의 물감은 자위쇼였을까, 감도 높은 키스였을까.


데이비드 월리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시답지 않은 것부터 불편할 만큼 무거운 것까지 하나하나 물어보고 받아 적고 싶다. 아무것도 걸러내지 않고 훌러덩 내뱉어주는 것이 속이 시원해 죽겠다고요. 한국에선 내가 아는 누구도 이렇게 불량하게 써주지 않는다고요. 인간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약간의 유머가 필요하다. 그렇게라도 웃기지 않으면 한 인간은 들여다보기에 너무 복잡하고 무거운 존재이기 때문에. 모기장 같은 투명하고 가벼운 농담을 하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좋다. 그가 그저 이런 사람일 뿐이라는 게 빤히 들여다보여서 좋다.


사실 나는 이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뻔뻔하게 아랫도리를 까고 (심지어 썩 예쁘지도 않은 자세로) 자위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영 밉지가 않은 기분이 드는 것이 어이가 없다. 예술에 대한 정의를 저렇게 내려놓고, 본인은 대놓고 자위쇼를 하면서 보는 나를 즐겁게 하다니. 무서운 작가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나의 관음적인 성벽까지 깨닫게 하는.


그래서 내 말은, 당신이 자위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도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당신의 책을 덮을 때마다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물어보지 못한 채 당신과 함께 묻혀있을 그 많은 것들을 매번 아쉬워한다는 것이다.


이 야속한 사람. 내가 이렇게 앓고 있는 걸 보고 있다면 꿈속에서라도 당신이 보는 현대미술이 혼자 하는 자위쇼인지 아니면 달콤한 스킨십인지 말해달란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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