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 같은 게 만날 일이 생겨서.
여인은 고독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소통되지 않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듯, 여인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생각이 아무 곳에도 가지 않듯, 여인도 어디로도 가지 않는 듯하다.
어슐러 르 귄, 단편 <겨울의 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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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는 동안은 여섯 시에 일어나는 게 습관처럼 된 모양이다. 저녁 여덟 시에 잠이 들던 새벽 두 시에 잠이 들던 귀신같이 아침 여섯 시에 눈이 떠진다. 침대에서 여유를 만끽하다가 어슬렁어슬렁 관광하러 나오기 딱 좋은 시간이다.
워싱턴 디씨의 모든 박물관들이 오전 열 시에 개장하는 걸 알고 있는데도 딱 맞춰 나오기가 쉽지 않다. 기껏 일찍 일어나 놓고 영화를 틀어놓거나 느리적 거리다가 계획한 것보다 한참 늦게 집을 나선다. 지금은 국립 자연사 박물관을 가는 중이다. 어제 국립 문서 보관소와 조각 공원,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을 둘려봤으니 오늘은 방향을 틀어서 예술적인 쪽으로. 시간이 되면 홀로코스트 기념관도 가야지. 가는 길이 정반대라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며칠 전부터 여행 중에 음악을 듣지 않고 있다. 요즘 이어폰들은 줄도 없어서 멀리에서 보면 통화를 하는지 혼잣말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생각보다 다정함이 많은 도시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모른 척 귀를 열고 친절을 기다린다. 이어폰을 빼고 나니 마주치는 미소들이 늘었다. 스스로가 초식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겁도 많고 경계도 많아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까지 아주 오래 걸리는, 곤충이나 설치류과의 피식자. 그게 나구나. 먹이사슬의 밑바닥 가장 넓은 칸을 차지하고 있는, 그게 나구나.
나는 지금 자연사 박물관의 포유동물관에 와있다. 인간이 참 많이도 죽였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길이 남겨놓고 싶은 예쁘고 귀한 것들을, 참 지독하게도 종류별로 전시해 두었다. 상처자욱이 다 보인채로 박제된 동물 거죽이 불편할 뿐이다. 바꿔 낀 눈동자들이 생기 없이 시꺼멓다.
둘러보다가 표범에게 사냥당해 나무 위로 끌려 올라간 임팔라와 눈이 마주쳤다. 척추가 꺾여 모가지를 늘어뜨린 초식동물이 나무 모형 아래 서있는 나를 내려다본다. 아니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구슬박은 눈알에 전시된 아프리카 동물 전부를 비추고 있다. 슬픈 지구본이다. 사실 저 녀석은 살아생전 표범에게 잡혀본 적이 없을 텐데. 인간에게 사냥당했거나, 인간이 사육하던 우리 안에서 죽었을 텐데. 차라리 표범한테 죽었다면 자연의 법칙 안에서 고요하게 아프리카 초원아래 묻혔을 것이다. 이렇게 미국 수도에 있는 박물관 어딘가에서 유리덮개를 쓴 다른 거죽들과 함께 방부처리를 당한 채로 천년만년 가짜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럼 나 같은 인간이랑 엇갈리는 시선을 마주칠 일도 없었겠지. 나도 평생을 사는 동안 비참하게 목이 비틀어진 꼴로 박제된 너를 보게 될 일 없었겠지. 그래서 세상이 요지경인가 보다. 너랑 나 같은 게 만날 일이 생겨서.
이제 이 세상에 아름다운 걸 봐도 이것이 ‘정말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진함이 남아있을까? 만들어진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너무나 판을 치는 세상에. 황홀한 무지개색 보석과 한때 아마존을 꿈꾸게 했던 모르포 나비의 파란 날개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건 정말, ‘판도라 행성’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 같다고. 그만큼 가상의 세계가 내 안에 성큼 들어와 있는 게 우습고 짜증스럽다. 어릴 때 과학책에서 보던 모르포 나비는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가까스로 멸종하지 않고 버텨줬는데, 왜 나는 이 경이로운 생물을 보고 제임스 카메론의 침략당한 행성밖에 생각하지 못하냐 이 말이다. 모르포 나비의 어깨에는 바다의 윤슬 같기도 하고 동굴의 보석 같기도 한 반짝임이 있다. 상상으로만 꿈꿨던 파랑이 그 투명한 빛을 면사포처럼 두르고 있는데, 이 눈부심을 설명하다가 지치면 그냥 이렇게 말해버릴 것 같은 것이다. 영화 ’아바타‘봤지? 그 안에 날아다닐 것 같은 색깔이야.
이 나비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다큐멘터리에서 사랑스럽게 보았던 새들이 박제되어 있다. 꼬리비녀 극락조, 어깨걸이 극락조. 이것 참 기분이 이상하다. 넷플릭스가 보여주는 화면 속에서는, 훨씬 빛나고 활기찼는데. 죽은 것들은 거슬거슬한 깃털 사이로 발악하는 듯한 독기만 남았다. 역사는 시체 안에서만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죽은 생물의 가죽 속에, 잘린 나무의 껍질 위에, 동강이 난 돌의 단면 안에. 전시를 보고 있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퍼뜩퍼뜩 떠오르는 것들을 글에다 채워 넣는다. 가끔은 말하고 싶었던 것의 서너 배를 욱여넣어버린다. 소통되지 않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했던 많은 생각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진다. 커다란 우주 어딘가에는 소통되지 않은 채로 소멸되어 버린 것들이 모이는 무덤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그건 블랙홀의 모양일지, 화성의 모양일지.
말로도 하지 못했고 글로도 쓰지 못했던 잡념들을 나는 꽤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단 하나도 남은 게 없다. 다 잃어버렸다. 물살에 돌멩이가 쓸려가듯 더 이상은 찾을 수 없는 곳까지 밀려간 모양이다. 강 하구처럼 그것들이 모두 모아둔 곳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흘러간 것은 흘러간 채로 끝이기 때문에, 결국 이런 문장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당하는 것이겠지. 내가 했던 생각들을 찾아 헤맨다. 너는 존재했단다,라고 말해주려고. 그런데 결국 찾을 수 없을 테니, 역시 없었던 거였나 봐, 하게 되는 것이다.
어슐러 르 귄의 저 말은 글 쓰는 사람에게 하는 말 같다. 존재하지 않는 생각을 붙잡아서,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것들을 글씨로 만들어 당장 눈에 보이게 남겨놓는 것. 내 안에 있는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쓸려나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싫다. 어떤 생각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되어버리고, 열심히 모아두었던 문장들이 연기처럼 뿌예져버리면 억울하잖아. 그래서 글을 쓴다. 흘러가는 물살에 물 몇 방울이라도 내 손안에 잡아보려고. 내가 살았던 흔적을 나에게도 보여주려고.
나중에 돌아보면 야, 너 이렇게도 살았구나. 하고 한번 비웃어주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