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Mar 27. 2023

Washington 05. 그게 정말로 무서운 거야

멋대로 너의 손을 잡았다


다정했던 한 줌의 뉴욕!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낯선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만나는 이가 세상에서 가장 외향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비록 스스로는 그런 두려움을 느낀다는 걸 모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저 사람은 나를 놀리고 나 자신에 대한 인상을 망가뜨리고 날 간섭하고 파괴하고 바꾸려는 게 아닐까? 저 사람은 나와 다르지 않을까? 그래, 그럴 거야. 그리고 그게 무서운 일이다. 낯선 사람이 낯설다는 것.


어슐러 르 귄, 단편 <아홉 생명> 중



*


어제는 새벽 여섯 시부터 일어나서 뉴욕을 갔다 왔다. 라이언킹 뮤지컬을 예매해 두었기 때문이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차창밖으로 영화에서 허리케인에 부서지는 용도였던 동네들이 슝슝 지나갔다. 어떻게 보면 미국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런던 같기도 하고 가만 보면 그냥 한국 같기도 하다. 세 시간 내내 철로를 달리면 그 유명한 뉴욕에 도착할 수 있는 동네에 있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군. 내가 지금 미국에 있긴 한 거로군.


뉴욕에 오기 전날은 하루 온종일을 테오도르와 보냈다. 숙소 앞 산책로를 따라 대사관 거리와 부통령의 집, 워싱턴에서 가장 큰 교회를 구경하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많이 웃고 흠뻑 설렜다. 내가 생각해 놓은 게 있는데, 하고 오늘 하게 될 일들의 계획과 동선을 이야기하는 테오도르의 날숨 섞인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 어머니를 따라 가톨릭을 믿는다는 테오의 햇살 같은 목소리. 똑같은 24시간도 그와 있으면 이렇게나 짧다. 못해도 열 시간은 같이 있었는데 못내 아쉽다.


내가 선물로 가져온 동생의 책과 전통주를 방에 두고 와야겠다고 해서 그의 아파트에 들렀다. 아파트는 <내셔널 트레저>에 나왔던 국립문서보관서의 코앞에 있었다. 들어가는 복도에 보티첼리의 스케치가 걸려있다. 호화로운 벽지와 샹들리에에 잠깐 시선이 멈춘다. 어쩐지 다른 세상에 와있는 기분. 테오가 짐을 내려놓는 동안 아파트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앞에 놓인 잡지를 뒤적거렸다. 미용 잡지와 스포츠, 신문이다. 흥미로운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저 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빠끔 열리더니 금발 미남이 튀어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참새처럼 손짓을 한다.


한, 여기 온 김에 옥상을 보여주고 싶어. 같이 가자.




나는 높은 곳이 좋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건물 꼭대기도 좋아한다. 학교를 다닐 땐 옥상 자물쇠를 따고 들어간 적도 있었다. 테오도르의 옥상은 깔끔하게 정돈된 썬베드와 바비큐 그릴, 작은 수영장이 있는 공용 정원이었다. 워싱턴 디씨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필 하늘이 눈부시게 투명하고 맑은 날이다. 구름이 머리 위를 솜사탕 실처럼 지나간다. 경치를 구경하기에 이만한 명당이 없었다. 도시 한가운데서 위풍당당한 워싱턴 기념탑, 반대쪽에 국회의사당. 새 대통령이 당선되면 걸어 내려오는 펜실베이니아 로드, 길건너에 국립 문서보관소, 트럼트가 소유한 호텔에서 울리는 시계탑까지. 저 멀리는 펜타곤 조형물도 보인다. 안 그래도 워싱턴 기념탑 전망대를 예약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속속들이 보게 될 줄이야. 네 덕분에 기념탑 위까지 올라가는 수고를 덜었어, 테오. 그렇게 잠깐 햇살이 내리쬐는 옥상에 앉아서 키득거리다가 트럼프 소유였던 호텔의 바에서 티타임을 갖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즐겁지 않은 때가 없을 정도로, 일분일초가 아깝고 애가 탈 정도로.


그렇게 하루의 끝이 되도록 테오도르의 얼굴만 보다가 새벽부터 기차를 탔다. 칵테일 세잔을 마시고 집으로 오는 길에 테오의 손바닥을 조물거렸던 것 같은데. 레미제라블 뮤지컬 얘기를 하면서 꼭 잡아보고 싶었던 그 손을 내 맘대로 만지고 훑고 간질인 것 같은데. 사실 워싱턴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혼자 다짐했던 것이 있다. 손만 잡고 오자. 더도 덜도 바라지 않으니까 지난겨울 커피 바의 옆자리에서 보았던 다부지고 든든한 손을 한 번만이라도 잡아볼 수 있다면. 진짜 그 하나만으로도 나의 워싱턴은 충분할 거야. 어떻게 그 이상을 바라겠어. 그런데 어쩌다 보니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나흘 밤만에 목적을 달성해 버렸다. 따뜻하고 무딘 손을 숙소까지 가는 내내 참 오래도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마주 잡아 주지 않았지만 뿌리치진 않았으니 괜찮은 건가. 사람은 정말 만족을 모른다. 원했던 바를 실컷 이뤄놓고서 테오도르가 마주 힘주어 깍지를 껴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손을 잡고 싶은 게 아니라 쥐어지고 싶었던 걸까. 나는 도대체 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멍청하다. 정말 멍청해. 어제의 그 온기를 얼마나 절실히 바랐는지 벌써 다 잊어버리고 욕심난, 욕심만. 그래도 손을 잡았다. 상상했던 모양 그대로의 감촉에 딱 맞는 크기로 맞물렸다. 나는 처음부터 손만 잡아볼 수 있으면 그걸로 좋은 거였잖아, 그 손을 잡아본 걸로 된 거야. 그걸로 됐어.


볼티모어, 필라델피아를 지나 뉴욕을 향해 달렸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덜컥 테오가 보고 싶어 졌다. 같은 도시에 아는 사람 편한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지, 늘 당해보고 나서야 안다. 뉴욕은 낯설고 차갑고, 높고 더럽다. 고작 하루짜리도 여행이라고 부츠로 멋을 부린 것이 후회될 정도로 여기저기에서 노숙자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기차역에서 나와 지하철 카드를 만드는 곳까지 오분이 되지 않는 거리인데 무서워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세상에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꼭 이런 꼴이겠군. 걸음을 빨리해도 고개를 쳐들어도 당황한 관광객 티를 벗을 수가 없다. 두리번거리고 허둥지둥하게 된다. 역 밖에서는 더 긴장하고 말았다. 기찻길을 만드는 데나 쓰일 것 같은 철골은 왜 이렇게 많은지. 어제까지만 해도 청량했던 하늘은 낯선 도시에서 유난히 쿰쿰하고 흐린 지. 소란스러운 도로와 빌딩 사이를 너머 피부에 닿는 것들이 소스라치게 차갑다. 어디라도 목적지가 필요하다. 발걸음의 끝에 무언가 있어야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을 수 있는 거야. 비로소 여기를 찾아왔다는, 목표한 곳에 무사히 당도했다는 안정감이 필요한 순간.


그래서 베이글을 먹었다. 가야 했던 브로드웨이의 정 반대에, 오늘 안에는 볼 수 없을 브루클린 브리지로 가는 길목에. 우스운 말이긴 하지만, 뉴욕은 그냥, 사람 사는 동네였다. 지저분하고 살기 힘들고 돈 없으면 팍팍한 그런 세상의 일부. 여행지에서 ‘사람 사는 곳‘이 주는 허무함이 있다. 내가 떠나온 곳도 사람 사는 동네라서, 내가 기대한 뉴욕인 이보다 더 휘황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사실 뉴욕도 그냥, 사람 사는 곳인데.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면 베이글 가게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브이를 보이며 윙크를 한다. 엄지손톱 만하게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슬금슬금 펴진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에 마주 웃어준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조금 따뜻하고 스며들게 다정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앤드류 가필드가 불량배들을 후드려 패던 뉴욕의 지하철은 눈물이 찔끔 날만큼 무서웠다. 지하 터널이 거대한 쥐구멍 같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서둘러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간다. 끊임없이 흐르고 정신없이 노래와 악취가 섞인다. 하지만 지상으로 나오면 사람들은 그럭저럭 친절하다.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인사를 셀 수도 없이 받았다. 저 멀리에 있는데도 굳이 문을 열고서 기다려준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본다는 기분 좋은 말도 듣는다. 낯설음이다. 유해하지 않은 유쾌한 낯설음. 아무것도 모르는 곳을 활보하는 데에서 오는 고양감. 거대하고 더러운 도시의 사람들은 활기차게 친절하다. 워싱턴 디씨에서도 사람들은 다정했지만 뉴욕은 한층 더 능글거리는 느낌이 든다. 동양인을 향한 캣콜링인가 하고 곤두세우고 있으면 의심할 수 없는 미소로 무안하게 만든다. 아무 이유도 명분도 없이 한국에선 들어본 적 없던 기분 좋은 말들에 둘러싸인다. 당신도 오늘 행복한 날이 됐으면 좋겠어요. 내가 느끼는 만큼.


테오도르의 친구 스티브를 만나기로 했던 날, 예고 없이 스티브와 함께 등장한 캐런과 토드는 낯선 사람이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예고 없이 만나게 되는 건 더더욱이 꺼린다. 그리고 그날 밤, 테오와 나는 스티브와 캐런, 토드와 함께 허리가 뒤로 훌렁 넘어갈 만큼 깔깔 웃었다. 그다음엔 뉴욕을 보자마자 겁을 먹었고, 이내 뉴욕을 꽤 좋아하게 되었다. 어떤 낯설음은 사람을 쉽게 녹여버린다. 미국은 거대한 낯선 나라다. 여기에서는 낯설지 않은 게 없어서(심지어 테오도르 조차도) 내가 밟고 있는 땅부터 머리 위의 하늘까지 의뭉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나를 볼 때도 똑같을 것이다. 여행을 빙자해 짝사랑하는 손님을 보러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이 조그맣고 이상한 여자애는 이 나라에서 무엇을 느끼고 갈까? 아직도 소비적으로 사용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미지? 매주 토요일마다 백악관 앞에서 열리는 시위에 대한 의아함? 미국과 한국 정부 사이의 기싸움? 너는 내가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니? 미국은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니?

그래서 우리는 편안하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나만 알고 있을 꿍꿍이속을 남겨두면서 음악과 술과 흥에 파묻혀 지낸다. 나는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 열흘 동안은.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어슐러 르 귄의 문장에 깊이 동의한다. 그 낯선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만나는 이가 세상에서 가장 외향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저 사람이 나를 놀리고 나 자신에 대한 인상을 망가뜨리고 날 간섭하고 파괴하고 바꾸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찾아온다. 누군가 나를 상처 입히는 게 두렵지만, 저 사람은 다르지 않을까? 저 사람이라면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그럴 거야. 그리고 그게 무서운 일이다. 낯선 사람을 진심으로 믿고 싶어 진다는 것.

모두가 마냥 진심이기만을 바라게 되는 것.


심지어 너에게조차도 낯설음을 느끼면서 네가 나의 손을 마주 잡아 주기를 바라고야 마는 이 순진한 마음이 무서운 일이라는 거다. 그리고 손바닥의 온도에 형체도 없이 녹아버리는, 안심해 버리는 그런 것들이 나는 정말 무섭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Washington 04.어떻게 날 안좋아할수가 있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