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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25. 2023

Washington 04.어떻게 날 안좋아할수가 있지?

내가 이렇게 예쁜데.



외관 공사 중이라 못생긴 국회의사당



나는 따스함이 넘쳐나는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잡고 생각한다. 가장 희망적이었던 순간에조차, 나의 하찮은 뇌는 그녀만큼 한없이 도취시키는 존재를 꿈에도 결코 상상해내지 못할 거라고.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

아직도 시차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지 언제 잠이 들어도 새벽 세시면 눈이 떠진다. 어제는 테오도르가 일행과 저녁을 먹는데 오겠냐고 하기에 거절하고 숙소에 있었다. 워싱턴 디씨 배경의 영화를 보다가 슬핏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테오의 어머니를 만났다. 새벽 세시. 어이가 없어서 눈이 떠진 모양이다. 다시 잠들지 못한 나는 보다 만 영화를 마저 보고 관광가이드북을 들춰보고 지금은 조깅 나갈 준비를 마친 채로 거울 앞에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부가 좋아 보인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을 안 믿었는데, 최근에 남자친구가 생긴 동생의 얼굴도 그렇고 지금 내 꼴도 그렇고 썩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가 싶다. 당장이라도 테오도르에게 달려가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나를 안 좋아할 수가 있어? 내가 이렇게 예쁜데.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으로 나온 2004년 개봉영화 <내셔널 트레저>는 완전히 미국 동부 관광 영화였다. 워싱탄 디씨에서 시작해 필라델피아, 뉴욕까지 차례로 밟는다. 다빈치 코드의 원조격인 셈이다. 예상보다 흥미진진했고, 당장이라도 영화에 나온 곳들을 둘러볼 수 있는 도시에 있다 보니 더욱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갑자기 이 영화를 찾아본 이유는 테오도르와의 밤산책에서 국립 문서보관소를 지나가다가 그가 했던 얘기 때문이다.


그 영화 봤어? 니콜라스 케이지가 독립선언문을 훔치는 곳이 바로 여기야.


그런 귀한걸 아무나 들어가서 볼 수 있어?


그럼, 볼 수 있지. 너도 나도 볼 수 있지.


그래서 한번 틀어나 봤다. 테오도르와 스티브의 담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숙소에서 뒹굴거리게 된 밤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뉴욕행 기차표를 예매해 두었는데 두고 봤다가 필라델피아 행 티켓도 노려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내셔널 트레저에 나온 미국 도시를 얼추 다 가보는 것이고, 필라델피아 현지에서 맛있는 필리치즈스테이크를 먹고 온다면 테오도르가 없는 여행도 그렇게 외롭지 않지 않을까.


어제는 맛있다고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먹고 왔다. 모닝 스테이크가 목적이었으나 아침 열 시부터 고기를 썰기엔 속이 무거울 것 같아 에그 베네딕틴을 주문했다. 잘 구운 해시브라운과 포슬포슬한 수란을 한입 베어 물자마자 김치찌개 생각이 났다. 하다못해 타바스코 소스, 아니면 할라피뇨라도. 바로 웨이트리스에게 케첩을 부탁하고 너털 웃었다. 이런 게 미국 음식이구나. 기름지고 느끼한, 노랗고 하얀 색깔만 가득한 접시. 시킨 생맥주는 다 먹고 해시브라운과 빵은 반씩 남겼다. 그것만으로도 배가 더부룩해졌다. 테오도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말과 함께 웃는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으. 그놈의 아메리칸 스타일.


걷는 내내 날씨가 정말 좋았다. 따사롭고 선선한 늦봄 같은 날씨. 구름이 높고 맑아서 엽서에서 보는 그림 같은 날씨. 영상 20도를 웃도는 기온 때문에 옷차림도 몸도 가벼웠다. 선글라스를 챙기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여행을 하는 느낌이 났다. 둘째 날 밤산책을 하며 테오도르와 걸었던 거리를 햇변 쨍쨍한 낮에 다시 걸었다. 태양 아래서 그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그의 일이 끝나는 시간이 늦은 저녁이니, 나는 이곳에서 한낮의 테오도르를 본 적이 없다. 처음 봤을 때도 우리는 밤에 만났다. 원래 바텐더와 손님은 밝은 빛에서 보는 얼굴이 더 낯선 법이다. 테오의 눈동자 색이 어땠더라. 고작 어제 하루 안 봤다고 흐릿해진다. 이상한 기분이다.


룰루 밀러의 문장을 읽으니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언니, 싱가포르에 있을 나의 여왕님.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상큼하니 접히는 눈꼬리와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한순간 잠깐 찍힌 사진도 아니고 영상처럼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 있다. 책 속의 주인공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도취되었던 무언가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단연코 그녀였을 것이다. 그때의 감정이 이렇게 길고 진하게 남아있는 것도 신기하다. 내 마음속에 계속 언니가 있는 건 부정한 걸까. 떳떳하지 못한 걸까. 사랑하는 감정을 저울에 올리면 어떤 것은 순수하고 어떤 것은 불순한 걸까. 여전히 언니를 사랑한다. 그 얼굴이 눈앞에 있으면 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기꺼운 마음으로. 신도가 신을 섬기듯이, 천사의 손등에 입을 맞추듯이. 그런 것이 도취인지 물어보고 싶다. 나는 테오도르를 좋아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 언니는 왜 아직도 나에게 이만큼이나 사랑스러운지.



까만 밤에 더 하얗게 빛나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테오와 나는 대통령이 행진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건물 외벽이 공사 중이라 천으로 칭칭 감싸 못생긴 꼴이었다. 네가 워싱턴 디씨까지 왔는데 의사당 외관이 완벽하지 않아 아쉽다고 말하는 옆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얼굴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네가 이렇게 예쁜데. 예뻐 죽겠는데.

사랑이 얼른 저울에 올라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좀 보게. 바보처럼 생각 없이 빠져들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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