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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23. 2023

Washington 03. 천 줄의 문장을

사랑으로만 채우고 싶었지


Hello, Washington Monument!



안녕하세요. 천 줄의 문장을 왜 쓰나요? 그 사이사이에 있는 한 줄, 세 줄의 문장을 가리기 위해서다. 보여주려고 쓰는 게 아니고 감춰주려고 쓴다. 어떤 한 문장만 읽으면 되는데 그걸 허락할 수는 없고 읽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믿음으로.


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중



*

글을 올리고 보니 혼자 하는 짝사랑을 이렇게 구구절절 적어놓고 있는 게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게 이것 말고는 없는데 무얼 어찌하겠어. 아마 이 나라에 있는 동안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사랑이야기만 주절거리게 될 것이다. 혼자 멋대로 설레발을 치고 조급해하고 김 빠지는 멋없는 이야기를.


어제는 시차적응 때문에 고되게 보냈다. 새벽 세시 반에 잠이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하다가 아침 아홉 시에 조깅을 하러 나갔다. 링컨 동상과 워싱턴 기념탑 공원을 한계까지 달리다가 고관절이 욱신욱신한 채로 숙소에 돌아왔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방 안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청소를 원하지 않는다는 팻말을 걸어놓은 것이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팁도 안 놓고 방도 엉망인 채로 나갔었다. 귀중품도 현금도 고스란히 나뒹구는 채로. 어쩐지 찜찜해서 구석구석 뒤지며 물건을 확인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잘 들어있었다. 고관절이 계속 쑤셔서 털썩 침대에 누워버렸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호텔 침대에서 그저 뒹굴거렸다. 그와 칵테일을 같이 먹은 지난밤이 퍽 나쁘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머릿속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웃을 때 보이는 송곳니가 예쁜.

챙겨 온 책을 조금 읽고,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운 채로 거의 네 시간을 침대 위에만 있었다. 편안하고 나른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블라인드가 반쯤 열린 창밖에서 햇살이 들어왔다. 맑고 투명한 날씨다. 조깅할 때까지만 해도 하늘 위에는 구름이 자욱했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더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해가 질 때까지 나가지 않았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먹음직스러운 컵케이크집을 보았다. 숙소에서 도보로 삼십 분, 버스로 십오 분. 아직 교통카드를 만들지 않았으니 도보로 가야 한다. 삼십 분은 산책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몸을 일으키니 의욕이 올라서 슥슥슥 옷을 입고 밖에 나왔다.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초면의 사람에게도 눈을 마주치고 안부인사를 해준다. 나는 여행객이다.

가는 길에 테오도르에게 곧 일이 끝날 것 같다는 문자가 왔다. 컵케이크를 먹으러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내가 가는 곳은 맛있기로 유명하다며 그만큼 유명한 다른 곳도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컵케이크 하나에 1000칼로리라고 덧붙인다. 그런 게 미국의 맛이라면서. 나는 컵케이크를 먹지 않고 거리 구경이나 하겠다는 답장을 했다. 워싱턴의 청담 같은 부자 거리. 해가 지는 시간이라 사진을 대충 찍어도 분위기 있게 나온다. 왕복 한 시간을 내리 걸어 숙소에 도착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굽 높은 외출복 차림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에서는 문자가 징징 울린다.


오늘 밤에 가보고 싶었던 데가 있어?

내가 한 군데 생각 중이거든.

오늘 같은 밤은 국회의사당을 가보면 멋질 것 같아. 어때?



스르르 눈이 감겼다. 테오도르는 일이 곧 끝날 것 같다고 말했던 시간으로부터 두 시간도 더 지나서 퇴근했다. 나는 그사이 쪽잠을 자고 개운한 기분으로 그를 만났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테오도르는 워싱턴디씨 메인 거리에 있는 건물을 하나하나 짚으며 알려주었다. 다 정치 용도의 빌딩이라 반은 알아듣고 반은 넘겨짚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건물이 높고 크고 거대하다. 대통령이 취임식 때 행진하는 길을 걸으며 테오도르가 이야기하는 미국의 상징들을 들었다. 귓바퀴에 달라붙는 테오의 웃음과 날숨이 섞인 목소리가 좋다.

드넓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 국회의사당의 공원 주변을 걸었다. 적당히 선선한 밤공기와 주황색이 도는 가로등, 신화에나 나올 것 같은 조각과 빌딩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테오도르는 내가 신은 높은 굽의 신발 때문에 계속 걸어야 하는 것에 미안해했다.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좋아서, 그저 앞으로 걸어가고만 싶다는 생각 했다. 딱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서, 숱 많은 속눈썹이 깜박거리는 걸 볼 수 있는 밤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런 것들을 쓰면서 내가 무얼 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소심한 외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나? 오늘과 어제의 기록을 원하나? 좋은 글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나? 심지가 없는 글을, 오직 나만 신나는 글을 자기만족으로 써내리고 있다. 한 줄을 쓰기 위해 천 줄을 썼던 적이, 두세 줄의 문장을 사용하기 위해 오천 줄을 썼던 적이 있었나? 아마 있었다면 정말 오래전일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퍼뜩 나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왜 나날이 얄팍해지고 옹졸해질까. 왜 나는 나를 위한 글밖에 쓰지 못할까. 이렇게 기운이 빠지고 실망스러운 것은 테오도르가 나를 사랑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허전해지는 것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글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좋았다고 하기엔, 나는 언젠가 이 글과 이 순간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 같아서. 이 경솔함을, 이 철없음을 말이다. 천 줄을 사랑얘기로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천 줄을 내 사랑으로만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고작 사랑때문에 하루 걸러 하루마다 기대하고 들뜨고 서운해하고 풀이 죽는 것은 정말 멋없는 일인데, 나는 그것을 적고 싶어 하고 있다. 딱히 전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아무 의미도 없으면서.

어떤 글은 때때로 뒷걸음질을 친다. 내가 쓰는 글이 딱 그런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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