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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21. 2023

Washington 02. 후회할 일은 없겠구나

적어도 내가 저지른 멍청한 짓을.



Hello, Washington DC!




그래서! 누구를 좋아할 수 있을까요? 제가요? 이전에는 아무도 마음에 없어서 누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됐는데 지금은 시간이 더 있어야 한다고만 느끼네.


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중



*

워싱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기내 방송이 나왔다. 워싱턴은 오늘 눈부신 날씨일 거라고.


벌건 대낮에 하늘을 달렸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큰 나머지 행성, 외계의 어떤 행성 같다. 한 시간 내내 동그란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궁금해했다. 땅 위에 무시무시한 마블링을 만들어내고 있는 저것이 산인지, 돌인지, 모래인지. 저곳은 정말 지구가 맞는지, 이렇게까지 날아왔는데도 대륙이 끝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출발할 땐 열한 시였는데 도착할 땐 여섯 시란다. 이 나라는 같은 땅덩어리를 가로질러서도 시차가 있다. 삼십 분 한 시간 정도가 아니라, 무려 세 시간 차이다. 아직 엘에이의 시간에도 적응을 못했는데 속수무책으로 비행기에 실려 시간축을 넘나들고 있다니. 나이가 든 게 확실하다. 장시간 비행에 몸이 배기고 진이 빠진다. 축 늘어진 젖은 휴지처럼 창밖에 행성을 내려다보며 날개 달린 쇳덩어리에 실려있었다. 분명 해가 중천인 아침에 출발했는데,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질 시간에 내려왔다. 행성을 보던 창문으로 노을을 봤다. 미국은 이상한 나라다.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는 무엇도 사람이 살기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만 같았던 화성 같은 나라. 사방천지 모든 것이 우주선처럼 거대한 낯설고 넓은 나라.


비행기에서 페인트를 부어놓은 것처럼 평평한, 미동도 없이 시퍼런 호수를 지나왔다. 비행기의 속도로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존재감을 보며 과연 이걸 호수라고 할 수 있나? 바다를 한 움큼 들어다 퍼 나른 것 같은데?라고 혼자 생각했다. 미국이 다른 나라들 몰래 혼자만 바다를 숨겨두고 있는 것 같다. 테오도르는 내 얘기를 듣고 구글지도에서 그 호수를 찾아 보여주었다. 액정 안에서도 광활하다. 원래는 근방의 사막지역까지 전부 호수였다고 말했다. 지금도 바다 같은데 예전에는 두 배도 더 되는 면적이었다고. 이 나라는 모든 게 크다. 호수도 바다만큼 크다.


워싱턴으로 가는 여객기 안에서 비행기 사고를 상상하며 시간을 때웠다. 기체가 지금까지 타본 그 어떤 비행기보다 많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아시아나 비행기에선 조금만 바들거려도 기장의 목소리로 안내방송이 나오던데 유나이티드 항공은 어라 조금 위험한 거 아닌가 싶을 때까지 잠잠하기만 하다. 아래 보이는 게 죄다 산맥에 바위뿐이라 이대로 추락하면 전원 사망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덜덜거리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이런 진동에도  복도에서 카트를 끌며 음료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애플주스를 먹었다. 사과즙 100프로의 캔 음료였다. 유나이티드 항공의 파란 플라스틱 컵에 얼음을 채운 것과 같이 나왔다. 하늘에서 얼음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애플주스를 따라놓은 채로 선잠에 들었다가 착륙방송을 들으며 눈을 떴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물이 녹이 밍밍해진 주스를 털어 넣었다.


유나이티드 항공에서는 기내 와이파이가 작동을 한다. 인터넷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수신 문자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이륙 직전에 테오도르가 보낸 문자다.

숙소가 어느 쪽이야? 7시에 있는 보스의 뉴스인터뷰에 동행해야 해서, 괜찮다면 그 시간 이후에 볼 수 있을까?

비행 때문에 피곤하겠지만 네가 워싱턴에 온 축하를 하고 싶어서. 공항으로 마중 가려고 했는데 오늘 일이 너무 늦게 끝나네.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답한다.


당연히 너를 가장 먼저 만나고 싶지. 호텔에 도착하면 연락할게. 날 만나는 것에 부담 갖지 마. 귀찮게 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그냥 이직하기 전에 휴가 겸 온 거야.

그리고 나는 안전하게 잘 도착했어!





멍청한 짓을 했다. 완전 대책 없는 짓이었다. 왜 아직도 누군가가 좋아질 것 같으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거지. 이제 자리가 있다고 훌렁훌렁 채워지기엔 모든 게 너무 조심스러운데. 호텔까지 오는 길 수다스러운 에티오피아 택시기사가 내게 물었다.

친구를 보러 왔다고? 남자? 그 친구 집에 묵을 거야? 아니면 그 사람이 너의 호텔비를 지불해 줬어? 네가 그를 보러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는 너를 얼마나 본대? 매일? 하루종일? 어디 어디로 데려가준다고 하는데?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것도 모른다. 테오도르는 답신이 느리고, 계획을 세워뒀다고 하지만 나에게 말해준 건 전혀 없었으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몰라. 한 번이라도 보면 그걸로 좋아.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널브러졌다. 먼지 묻은 옷차림으로 뒹굴거렸다. 택시 안에서 에티오피아 택시기사의 수다에 사정없이 당하고 있을 때 테오도르는 방송국 뉴스 스튜디오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보스가 지금 메이크업을 받고 있어.


이게 뭐라고 또 킬킬 웃었다. 테오도르의 보스가 뉴스에 출연하기 위해 메이크업을 받는 풍경을 상상했다. 띠링, 또 문자가 울린다. 테오도르가 보낸 문장 곳곳에 일에 지쳐 피곤한 기운이 느껴졌다.


8시 45분까지 모비딕 바에서 봐. 난 너무 피곤해서 한잔밖에 못 마실 것 같아. 아, 정말 일이 너무 많았어.


나도 마찬가지야. 한잔 이상은 못 마셔. 나이가 들었나 봐, 장거리 비행은 이제 못하겠다.


그도 내 문자를 보고 웃었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네가 웃는 모습은 보고 싶다.

공항에서부터 입고 와서 꼬질꼬질한 옷들을 갈아입고, 멀끔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는데 스스로의 낯짝이 꽤 괜찮아 보인다. 검은 머리에 키 작은 동양인인데 이 정도면 봐줄만하지 않나. 테오도르가 찍어준 주소는 내 숙소에서 십분 거리의 술집이다. 가죽부츠를 신고 또각또각 걸었다. 이십 대 초반 이후로 여행에 굽이 있는 힐을 챙겨 온 건 처음이었다. 참 별일을 다 해 본다.

워싱턴의 어두운 밤거리는 스산하다. 저스틴 비버처럼 바지를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 입은 노숙자들이 카트를 끌고 돌아다녔다. 미국의 밤거리라니 어쩐지 두리번거리게 된다. 목이 어깨 안으로 쏙 들어간다. 껍데기를 두고 온 달팽이 같다.


예전에는 비어있는 옆자리에 누군가 흘러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만 해도 나쁘지 않은 연애를 했다. 지금은 누구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무서울 지경이다. 여기까지 오는데만 하늘에서 열다섯 시간. 한국 밖의 시간까지 긁어모아도 이 녀석을 사랑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음악소리가 시끄러운 바에 앉아 드링크 메뉴를 뒤적거리는데 누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밀밭 같은 머리카락, 보석 같은 눈동자.

네가 너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다 괜찮아졌다. 오랜만에 푹 안긴 품이 따뜻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너무 명백하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않은 것을 후회할 일은 없겠구나.

너를 보러 오길 잘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 파란 눈이 너무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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