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Mar 20. 2023

Washington 01. LA공항에서

마골피의 비행소녀

하늘에서 본 할리우드 사인


모든 도시는 단지 통과하기 위해서만 그 도시들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안나 제거스, <통과비자> 중



*

나는 지금 로스앤젤레스에 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짧은 환승시간을 맞추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국의 공항이다. 백인들이 득실득실한 유나이티드 항공의 탑승터미널. 영국도 가보고 독일도 가봤는데 피부 허연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긴장부터 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쫄보였나.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원래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모르겠다.


창가를 좋아하는데 통로 자리를 줬다. 그런데 옆에 두 자리가 전부 비었다. 이륙은 46분, 지금은 31분. 이륙까지 옆자리가 비어있으면 슬쩍 자리를 옮겨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다리를 쭉 뻗고 잘 수도 있다. 나는 다섯 시간을 더 달려야 워싱턴에 도착한다. 착륙 전 하늘에서 봤던 미서부의 산맥이 경이로웠다. 메마르고 거대한, 원주민의 나라.


기내에서 웰컴 뮤직으로 내가 근래 가장 많이 듣는 곡을 틀어주고 있다. Temptations의 My Girl이다. 가사가 아름답다.

넌 아마 말할 거야. 대체 뭐가 내 기분을 이렇게 들뜨게 하는지. 그건 너, 너지. 단연코 너야. 난 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내려오는 하늘에서 영화에서나 보았던 할리우드 간판을 발견했다. 페덱스 비행기와 각진 차가 달리는 하이웨이도. 신기한 기분이다. 고작 두 시간, 환승을 하느라 유리 터널 사이를 뛰어다니기만 했는데도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로망이 생긴다. 웨스트 할리우드와 베벌리 힐즈가 있는 곳. 광활하고 무자비한 미국의 서부.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느껴진다. 이 나라는 너무 넓다고. 크고 무섭고 낯설다고.


솔직히, 미국을 썩 모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체 여기저기에서 많이 보기도 했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드글드글 하니까 막상 가보면 내 집 같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했다. 와보니까 느껴진다. 나는 이곳에 대해 단 하나도 모른다. 나는 이방인이다.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건 내가 엘에이를 통과하기 위해서만 걷고 있기 때문일까. 빙하처럼 새파란 색깔의 항공기를 타고 있기 때문일까. 테오도르는 말했다.

캘리포니아는 아름답지. 워싱턴디씨는, 글쎄. 최고의 선택은 아니야.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워싱턴디씨에 네가 있잖아. 워싱턴이 가장 멋진 곳이야. 오와타나도.


오와타나는 눈보라가 부는 테오도르의 고향마을이다. 테오도르에게서 답장이 온다.


하하, 맞는 말이야!



웰컴 뮤직이 꺼졌다. 새파란 항공기가 활주로를 달린다. 나는 지금 머릿속으로 마골피의 비행소녀를 부르는 중이다. 미국땅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한다. 멍청한 짓을 했네. 너 하나 보고 싶다고 이렇게 무모하게 와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 게 아니었는데.


활주로를 떠나 비행기는 이제 어둠 속을 날아요. 서울의 야경은 물감처럼 번져 가고.


창 밖의 햇빛에 눈이 따갑다. 영상 십칠 도의 더운 날씨. 서울도 아니고, 어둠 속도 아닌데 그냥 활주로만 달린다. 옆자리는 비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서 장난감 같은 엘에이를 동영상으로 찍는다. 새파란 비행기 안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Washington 00. 남의 사랑이야기 좋아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