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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19. 2023

Washington 00. 남의 사랑이야기 좋아하세요?

워싱턴 디씨행 비행기를 탄 이유



릴리는 캔버스를 움직이는 척하며 그야말로 불순물을 제거한 순수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상에 결코 덤벼들지 않는 사랑, 수학자가 기호에 대하여 품는 사랑, 시인이 자신의 말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이에요. 온 세계에 널리 퍼져 인간을 이롭게 하죠.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중




*


오랫동안 글쓰기를 건들지도 않던 낙오자가 다시 돌아왔다!

근 7개월 만인가. 조금만 더 게을리 굴었으면 브런치가 나를 쫓아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출국 준비 중이다. 비행기 시간은 딱 열두 시간이 남았다.


새 글을 쓸 때마다 나의 엉망진창인 인생의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고민한다. 밀렸던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긁어모으는 데만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요즘 나는 기분이 좋고, 세상이 꽤 눈부시다고 생각하며 내 청춘에 2막이 열린듯한 희열감에 들떠있는 중이라 걱정이 없다. 다분히 자신만만하고 건방진 상태라는 얘기다.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의 수염이라도 뽑아보고 싶은 기분.


이직에 성공했다. 이력서와 두 번의 면접, 연봉 협상을 만족스럽게 끝내고 인생 처음 대리라는 직급으로 글로벌 주류회사 중 한 군데에 입사하게 되었다.

전 대표의 입장으로 경력증명서에 사인을 해준 M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아이구, 바텐더들의 공무원이나 다름없는 회사에 들어갔네.”

연봉 제안 메일에 줄줄이 따라붙은 복지조건들에 어안이 벙벙하다. 이런 거구나. 회사는, 밤에 일하지 않고 서서 일하지 않는, 서비스직이 아닌 회사는 이런 곳이구나.


꿈만 같다.

사원증이 생기고, 내 책상이 생기고, 내 PC가 생긴다. 가벼운 공기로 채운것처럼 가슴이 팡팡하게 부풀어 오른다. 온몸이 가벼워 죽겠다. 날아갈 것 같다.



열두 시간 뒤면 나는 동부에 있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로 출국한다. 나의 사랑하는 손님이자 친구인 테오도르를 보러. 계획도 대책도 없다. 비행기를 한번 경유하고 스물여덟 시간을 날아서 나는 너를 보러 가.

네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내가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는 이유는, 내 바텐더 경력에 너무나 소중한 단골손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늘 나와 M과 매니저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테오도르를 만나기 위해서.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얘기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대로라면 수학자가 기호를 보며 느끼는, 시인이 문장과 단어에 느끼는 전 세계인 호의로 그를 만나러 간다. 늘 멀리에서 ’네가 있는 곳에 놀러 갈게 ‘라는 비현실적인 말을 웅얼거리기만 하다가 드디어 티켓을 끊고 여행을 준비한다. 이제 우리는 바텐더와 손님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너를 사랑하는, 너를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불순하게도 생각한다.

너도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역시 기대가 된다. 오늘부로 펼쳐질 모든 것에 단 하나도 빠뜨릴 것 없이 글로 쓰고 싶다. 여행을 앞두고 부랴부랴 좋은 카메라를 구입했다. 내가 웃는 모습이 많이 담겼으면 좋겠다. 테오도르가 웃는 모습도 담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리고 내가 워싱턴 디씨에서 보게 될 것도, 겪게 될 것도, 글로 쓰게 될 것도 다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면 좋겠다. 이게 불순물을 제거한 순수한 사랑일지는, 글쎄.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남의 사랑 얘기를, 처음 날아가보는 워싱턴 DC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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