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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13. 2023

Washington 13. 대리석이 하늘을 나는 법

나를 좀 알아보려고 했더니 결론이 이게 뭐람


행운을 말해줘



내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정희진,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머리말 중


*

워싱턴에서 내 것이 아닌 뭔가를 많이 들고 왔다. 그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술이었고 처음 보는 문장이 박힌 책갈피였고 짭짜름하면서도 단맛이 나는 과자였다. 어쩌다 보니 눈이 파란 왕자님과의 키스도 있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미국.

그런데 내 것이었던 것들도 그 넓은 나라에 몇 개 떨어뜨리고 왔다. 손거울 두 개, 일제 립스틱 하나. 백인 할아버지가 건네준 뷰티잡지와 차이니즈 레스토랑의 나무젓가락. 마지막 두 개는 캐리어가 터지기 직전에 탈출시킨 것들이니 목록에서 빼야겠다. 하지만 남은 세 개는, 거울과 립스틱은 마지막날 그리고 마지막 밤 전날에 잃어버렸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여행 내내 나와 잘 붙어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리게 될 줄 모를 만큼.

거울 하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론과의 저녁식사에서였다. 내가 원래 쓰던 거울에는 세서미 스트리트의 연두색 털뭉치가 그려져 있었는데 바론이 그걸 보더니 ‘나는 걔 말고 쿠키몬스터가 좋아.’라고 말했다. 마침 호텔에 두고 온 여분 거울이 파란색 쿠키몬스터 그림이라, 그걸 떠올리고 저녁약속이 있던 날에 들고 왔던 것이다. 봐, 네가 좋아한다던 캐릭터야. 네 생각이 나서 바꿔 가지고 왔지.

그리고 그날 그 거울을 잃어버렸다. 바론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에 당황해서 도망치듯 일찍 집에 들어간 날이었다. 거울은 우리가 스테이크를 먹었던 그 레스토랑에 덩그러니 남겨졌거나, 내가 탔던 택시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마지막밤이 되기 전날, 파란색 쿠키몬스터 거울은 그렇게 잃어버렸다.


남은 거울 하나와 립스틱 하나는 테오도르와 밤을 보냈을 때 잃어버렸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가벼워진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거울 두 개와 립스틱을 잃어버렸다고. 찾으러갈수도 없는 곳에서. 이름 모를 세서미스트릿의 녹색 인형이 그려진 거울은 어디에서 나를 벗어났을까. 테오가 자주 간다던 맨해튼을 홀짝인 바의 의자였을까, 내가 코트를 벗어놓은 그의 집 소파였을까. 립스틱은 거울이 나를 떠날 때까지 남아있었을까, 아니면 좋은 기회라고 우르르 나가버렸을까. 그것들이 내가 지난밤 옹송그려 앉았던 1인용 소파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면 테오도르는 그걸 보았을지도 궁금하다.  내 생각을 했어? 내 생각은 하니?

자극과 정보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와중에도 어떤 것은 여러 번 나를 건드린다. 마야 엔젤루의 문장이나, 워싱턴 디씨에서 잃어버린 물건 같은 것. 그것들을 잃어버렸을 때의 나와, 그 물건들이 삼켜진 장소 같은 것들이.


삶이란 게 욕심 많은 조각가의 망작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멋대로 만들다가도 적당한 때에 손질을 멈췄어야 했는데, 버티고 있다 보니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습은 흔적만 남거나 사라져 버리고 낯선 형태만 남았다. 언젠가 또 다듬어질, 평생 완성되지도 않고 완벽해지지도 않을. 손에서 놓아야 할 때가 너무 늦은 나머지 작아지고 깎아져 종국엔 호두알만큼의 돌멩이로 끝이 날 나의 인생.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는 정희진의 말에 꾸역꾸역 지난날을 반추해 보았는데 남은 건 망해버린 조각상과 찜찜한 분실물뿐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지? 또 깎여나가 떨어질 모습들에서 뭘 발견해야 하는 걸까. 하루하루 내가 알던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어 멋쩍은 요즘이다.

글 쓰는 걸로도 안되고, 기억하는 걸로도 안된다. 후회하는 걸로는 더더욱 되지 않는다. 나를 안다는 것을 포기한다. 잠깐 나를 놓고, 내가 알던 나를 훌훌 날려 보낸다. 호두알보다 더 작아지면 민들레 홀씨만큼 될 수도 있다. 돌가루 분자가 될 수도 있다. 대리석이 하늘을 날 때는 뭐, 그런 때인가 보지. 형체라는 것도 없이 바람에 떠밀릴 때인가 보지. 다른 건 몰라도 하늘을 나는 건 내내 좋아했다. 무서워하면서도 하늘을 날고 싶다고 바랐다. 난 참 뚝심 있게 하늘을 좋아하는 놈이구나. 매분 매초를 하늘바라기로 살고 있구나 생각하며 시간을 때운다. 다 바스러져도 하늘은 한번 날아볼 수 있겠지,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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