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내일이 있어서.
우리는 필패하도록 설계된 전투에서 몇 년을 더 싸웠다. 사람들은 이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다. 나 또한 그러하다. 충분히 노력하면 달라질 거라고 확신했기에, 나 역시 너무나 터무니없는 조건들에 만족했다. 하지만 복지 없이 최저임금을 주는 일자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월 400달러씩 상환해야 하는 대출금을 어깨에 지고 살다 보면, 아무리 열정이 있다 해도 몇 년쯤 지나 뭔가 심하게 글러먹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많은 밀레니얼이 번아웃을 겪고야 이 지점에 다다랐다. 하지만 “열정은 좆 까고 돈이나 주쇼”로 대변되는 밀레니얼의 새 구호는 매일 더 큰 설득력과 힘을 얻고 있다.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중
*
우릉우릉. 천둥이 친다.
타닥타닥, 빗소리가 천장을 때린다.
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는 밤이다. 복층에 하늘과 마주 보는 창문이 뚫린 내 집은 비 오는 날마다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소리로 가득하다. 저절로 평화가 찾아온다.
여전히 구제할 방도 없이 전쟁터 같은 혓바닥을 하고 꾸역꾸역 끼니를 챙겨 먹었다. 퇴근하는 길 버스 안에서 일전에 호주에서 도움을 받았던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자그마치 2년 만에 듣는 목소리다. 반갑고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난다.
델타는 호주에 있는 내내 나를 잘 챙겨줬다. 나는 습관적으로 나를 예뻐하는 사람들 곁에만 머무르려고 든다. 이것도 생존본능일까. 더 살고 싶어서 이렇게 매달리는 걸까. 그들의 눈길이 닿는 곳에 있으면 괜히 마음이 든든해진다. 어쩐지 혀도 짧아지고 애교도 더 부리게 된다. 오늘도 델타는 말한다. 호주에 와. 다시 같이 일하자. 너라면 언제 오더라도 환영이야.
안 그래도 델타가 보고 싶어서 멜버른에서도 차편으로 9시간을 더 가야 하는 깡시골에 방문을 할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장난 삼아 그 얘기를 하니 신이 난 목소리가 더 커졌다. 언제나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주문을 걸어주는 델타의 목소리. 영주권 줄게. 나랑 일해. 내가 다 해줄게. 너 하고 싶은 거 전부 맞춰줄 수 있어.
심지어 제안한 연봉도 지금 있는 회사보다 훨씬 높다. 내 집이 너무 좋지만 이 집으로 한 달에 꼬박꼬박 170만 원씩 지불하고 있는 입장에서 도무지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고, 몸도 좀 편했으면 좋겠다. 2년 간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는데, 홀라당 호주로 날아가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약이 끝나서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즐거운 일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얼렁뚱땅 전화 한 통에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일하는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곳에서 나 같은 부랑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을 뿐. 계속 다니면 과장도 되고 전무도 될 거라는 엄마아빠를 두고 입사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딴생각을 하고 있다. 면목없지만 어쩔 수 없다. 나에 대한 자신감을 깎아먹고 혼자서 자책하기에는 내가 너무 아깝다. 나는 회사와 맞지 않는다.
델타와 세 시간을 넘게 통화하면서 홋카이도와 캐나다 옐로우 나이프 여행계획도 세우고, 나 모르는 사이에 있었던 호주의 기상천외한 일들을 건너들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호주에 가고 싶다고. 당장이라도 세컨비자를 신청해서 원할 때 슝 호주로 날아가버리고 싶다. 이 답답한 회사를 떠나서.
세컨비자는 내년 9월까지 신청할 수 있다. 발급받는데 1달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7월 중에 서류 제출을 끝내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회사 계약기간은 내후년 이월이고, 집 계약은 내후년 유월까지다. 가려면 학교도 졸업하고 가야 하니 일 년 반은 마저 공부해야 하고. 영어시험 점수도 만들어야 하고. 호주 영주권에 큰 미련은 없지만 기왕 다시 갈 생각을 한 거 결격사유 없이 신청해보고는 싶다. 다른 나라에서 온전하게 살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지금의 휘황하고, 그럴듯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자리를 두고 가면 자유롭고,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을 마주하게 될지.
아직도 필패하도록 설계된 전쟁에서 방패에 창 하나만 들고 백병전을 하는 기분이지만 그래도 선택권이 하나 늘었으니 나쁘지는 않다. 호주의 시골 귀탱이에서 나는 지루하고 쿰쿰하게 살았다. 난생처음 우울증 비슷한 것에 발도 담가봤다. 그래도 일 할 때만큼은 재미있었다.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서, 그들과의 스몰톡이 사랑스러워서, 그 사람들의 파티에 함께 서있는 것이 즐거워서. 열정은 좆 까고 돈은 잘 주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 말한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열정도 열정이고 돈도 돈인데 나를 아껴주는 사람 옆에서 일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물론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호주를 바라보며 내후년까지는 속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속이 편한 게 제일이다. 계속 살아있어야 호주도 갈 수 있다. 그래야 델타를 한번 더 볼 수 있다. 그녀의 요리가 어떤 맛이었는지, 검은색 쉐프복이 그녀에게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도 기억이 날 것이다. 열정은 좆 까고 돈이나 주쇼. 1년 하고도 6개월 남았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재계약하지 않을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