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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l 23. 2021

Bar-00. 입에서 단내가 난다

한국에서의 근무 시작





쉬파리는 눈의 짠내와 입천장의 단내를 맡고 오는 거야. 약골일수록 눈물이 많고 침샘은 달아.


헤르타 뮐러, <숨그네> 중



*


6월 18일에 자가격리를 끝내고 새로운 곳에 근무한 지 갓 2주가 넘었다. 카페와 바가 같이 있는 공간이라 첫 주에만 아침 11시 반까지 출근인 것이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다. 해가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와야 눈을 뜨는 삶을 산지 오 년이 넘었는데! 심지어 출퇴근 길도 멀어 왕복으로 두 시간이 족히 걸렸다. 그 짓을 며칠 했다고 입 안에는 새끼손톱만 한 구내염이 나고 오른쪽 입 옆이 헐어 터졌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곧장 이어지는 10시간가량의 근무에 발바닥과 종아리는 퉁퉁 붓는다. 행복하지만 몸이 벅차다. 육체가 뇌와 의욕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게 느껴지니 스스로가 당장이라도 병상에 누워야 할 것 같은 환자처럼 보였다. 나는 약골이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오후 두 시에 출근하고 있는 지금, 구내염은 다 나았지만 보기 흉한 입꼬리는 그대로다. 맨 위의 문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움찔하게 된다. 역 근처 상권에다 여름의 무더위와 조명으로 한참 가게 안에 날파리가 극성이라 그렇다.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눈앞에 지나다니는 벌레들을 휘 쫓는 걸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겪게 되는 상황이다. 모든 것의 대비가 되지 않은 것. 아직, 아직은 말이다.


자가격리만 끝나면 또 아침저녁으로 강변을 달리리라 다짐했는데 조깅은커녕 출퇴근 전후로 넝마처럼 뻗어서 잠만 자고 있다. 퇴근 전에는 날이 덥고 퇴근 후엔 지나치게 늦은 시간인 데다가 발이 아프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더니 변명을 늘어놓자면 끝이 없다. 무엇보다 위스키 공부를 기본부터 다시 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느라 그나마 읽던 도서관 책도 전부 놓아버렸다. 지금은 흑인 인권 소설을 읽을 때가 아닌 것이다.


가게에 위스키를 궁금해하는 손님들이 많이 온다. 오 년 동안 바텐더 일을 하면서 뭘 한 건지, 싱가포르에서 그나마 알던 지식들도 홀라당 까먹고 온 건지 어물쩡 넘어가면서도 손님들한테 죄책감이 든다. 바 안에 있는 바텐더라면, 궁금해하는 분들에게 충분할 만큼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전문성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 가게에 구비된 위스키와 리커, 진과 보드카 및 기타 주류에 대한 정리를 끝냈다.

수를 셈해보니 대략 130가지가 넘는다. 대략적으로나마 이 모든 것들의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가 있고, 지금 내 머리는 조금만 찔러도 펑 터져버릴 것 같다. 나는 약골이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오전에 일어나 두어 시간 주류의 역사와 야사에 대한 공부를 하고 한 시간 가량의 출근길에 오전에 했던 노트를 복습한다. 가급적이면 근무 중에 공부한 것들을 셀링 하고 손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귀가하는 길에는 근무 중에 부족하거나 보충이 필요한 지식들을 찾아본다. 집에 오면 하루 종일 머리에 욱여넣은 새로운 정보들을 복기하며 잠이 든다. 머릿속 한 켠엔 계속 삼일 전 읽다 만 흑인 린칭에 대한 구절이 붙어있다. 얼른 이 모든 것들이 오롯이 나의 기억과 지식들이 되고 마음이 편해져서 다시 술에 대한 주제가 아닌 것들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책갈피를 껴둔 채로 나는 <버번위스키의 모든 것>을 읽어야 한다. 지금처럼 형편없는 실력이라면 그 유명한 데이비드 위셔트의 <위스키 대백과>를 재독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텐더에겐 앎과 배짱이 필요하다. 누구의 질문에도 당황하거나 버벅거려선 안된다. 바 안에 있는 사람은 초연하고 여유로워야 한다. 세상에 힘든 것은 다 비켜 가는 것처럼.


입 옆이 따가워 입모양을 크게 말할 수 없다. 활짝 웃으면 곧 혀에서 피맛이 난다. 나는 약골이다. 가게에는 파리가 많다.


막상 보이니 하는 말인데, 아직 울지는 않았다.

영락없이 풀리고 빠진 자세로 근무하다가 오랜만에 각 잡고 주류 서적을 뒤적거리니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오 년 동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이 휘황한 바틀들과 원액 속에 이런 이야기와 이런 사연이 들어있었다니. 한 문장을 읽어도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위스키가 이런 특징이 있어서 다른 바텐더들이 손님에게 이런 설명을 해준 거였구나. 이게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바보같이 이걸 모르고. 바텐더라면서 이런 것도 모르고. 하는 것의 연속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배워가고 채워지는 쾌감이 있다.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주는 손님이 있다. 그래서 나는 울 필요가 없다. 어쩌면 그렇게 심한 약골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비실거리는 몸뚱이와 과부하된 뇌를 부여잡고, 얼굴로 날아오는 쉬파리를 휘휘 저어 막으며 계속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오늘 예쁜 근무복과 튼튼한 근무화를 샀으니 그래도 다음 휴일부터는 강변을 한 바퀴라도 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는 지금보다 많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든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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