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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l 24. 2021

Bar-01. 천천히 드세요

위스키로 고주망태가 될 수 있다면!

​​​



마크 트웨인이 그랬던가. “뭐든지 과한 건 나쁘지만, 좋은 위스키를 과음하는 건 딱 좋다”고.

조승원, <버번위스키의 모든 것>


*



마크 트웨인이 언제 이런 말을 했지!


허클베리와 톰의 모험만 열심히 읽고 작가가 이렇게나 운치 있는 말을 한 것은 몰랐다니. 증류소 투어의 마지막에 온갖 종류의 위스키를 시음하고 알딸딸해진 작가의 유흥을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먼 곳에서 이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넓은 땅 넓은 호수에 자연을 아끼며 지어진 증류소 투어의 끝자락,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할 만큼 얼큰한 취기가 느껴져서.


장마철이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가게가 한가하다. 오후 내내 과하다 싶을 만큼 손님이 없다가 해가 막 뉘엿뉘엿 저물 무렵 여성 손님 세 분이 들어왔다. 근처에 회사가 있는 이 분들은 오늘 위스키를 처음 ‘제대로’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위스키와 소주의 차이점과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오크통에 대해 가볍게 설명을 드리고 몇 번의 시향을 거쳐 위스키를 따르는데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너무 세거나 따갑거나 힘드시면 안 될 텐데. 따른 위스키를 바로 드리지 않고 위스키 전용 잔의 모양과 시음 방법에 대해서도 전달해 드린다. 몇 번이고 강조하는 말은 이것이다.​


“급하게 드실 필요 없어요. 조그마한 액체에 담겨있는 향과 풍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겨보셔요.”



위스키는 과음을 하기 힘들다. 저도 모르는 새 꼴깍 취해버리기엔 위스키 잔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온신경을 쓰느라 정신이 되려 말짱해지기 때문이다. 나도 한 잔을 받으면 바닥까지 비우는데 삼십 분에서 사십 분은 족히 걸린다. 손가락 만한 길이의 잔에서 사십 분이라는 시간을 들일만큼의 알코올이 뿜어져 나온다. 진탕 먹고 취해버리기엔 아까운 술이다.


늘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위스키에만 관심을 쏟아부어 이렇게 집중적으로 버번위스키에만 집중된 책을 읽으니 흥미롭고 머쓱하다. 내 입맛에 향 좋고 부드러운 게 스카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울이 그쪽으로 쏠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위에 적어둔 것도 버번위스키보다는 싱글몰트 위스키의 시음에 적합한 내용들이다. 애당초 버번위스키는 향을 모아주기 위한 튤립 모양 잔조차 사용하지 않으니. 책을 읽고 보니 버번위스키만의 터프함을 혀 위에서 즐기는 방법으로는 코와 입을 이용해 냄새를 맡은 후에 조금 입에 넣고 온 사방에 굴리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만큼 버번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을 내용이다. 오늘도 근무하며 좋은 손님을 만나고 하고 싶은 술 이야기를 실컷 하고 빠짐없이 M에 대한 자랑도 늘어놓았다. 좋은 책을 얻어 버번위스키를 정의하는 법률들과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한층 고차원적으로 습득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공부만 한 셈이다. 내일 아침엔 헨드릭스 진에서 새로 출시한 시그니처 진을 찾아보는 일이 남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게걸스럽게 파먹어도 허기가 진다. 지식이란 원래 이렇게 목마른 거였다는 걸 오랜만에 느낀다.

그래도 가게에 있는 술을 한번 쭉 훑었다는 것에 마음이 놓여 뒷전이던 책을 슬금슬금 다시 읽고 있다. 인디언과 흑인 노예제와 노근리 학살에 대한 것들. 그런 것들.

아마 눈을 좀 일찍 뜨면 출근 전에 삼사십 분쯤은 조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좋은 공간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 삶이 다시 다채로워진다. 치솟는 역병 환자의 수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오늘도 나는 마스크 안쪽으로 숨이 헉헉 차도록 술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것이다. 손님들을 반기고 마주 보면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다. 술에 둘러싸여 이 예쁘고 발칙한 리커들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언젠가 위스키만으로 과음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마크 트웨인의 말과 작가의 메이커스 마크 증류소 탐방기를 마지막으로 이불을 편다.


내일도 날이 맑고 위스키와 술을 궁금해하는 좋은 손님들이 오기를. 그분들 앞에서 내가 가치 있는 답변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계속 그런 날들이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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