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화된 악_사유의 중단, 무감각한 실행
!주의!
본 글은 《브레이킹 배드》뿐 아니라 본 시리즈와 스핀오프 시리즈가 구성하는 "앨버커키 유니버스" 세계관 모두를 다룹니다. 따라서《브레이킹 배드》,《베터 콜 사울》및 《엘 카미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악은 처음부터 괴물의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는 처음에는 갈등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계획하고, 명령하고, 실행했다. 도덕적 고민은 사라졌고, 행동은 자동화되었다.
시리즈 초반의 월터는 여전히 갈등하는 인간이었다. 크레이지 에이트를 죽일 때, 그는 며칠 동안 고뇌했다. 제인이 질식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는 눈물을 흘렸다. 이 시기의 월터는 인간적 죄책감과 윤리적 망설임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월터는 변한다. '해야 하니까 한다'는 실행만 남고, '해도 되는가'라는 고민은 사라진다. 망설임은 생략되고, 감정은 무디게 억제된다.
Walter:
"2분 안에 처리해야 해"
Jack:
“하지만 세 개의 교도소에서, 2분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처리를 한다고?
빈 라덴을 제거하는 것도 이 정도로 복잡하진 않았을 거야.”
Walter:
“내가 원하는 방식 그대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해.
문제는 하나야. 그걸 네가 해낼 수 있는 사람이냐는 거지.
(The only question is, are you the man to do it?)"
Walter (덧붙여):
“방법을 찾아.
그걸 위해서 내가 돈을 주는 거니까.”
— Breaking Bad Season 5, episode 8 "Gliding Over All"
시즌 5에서 월터는 교도소 안에 수감된 마이크의 부하 10명을 2분 이내에 모두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누가 어떻게 죽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타인의 생사도, 도덕적 판단도 고려하지 않는다. 살인은 그에게 더 이상 충격적 사건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관리 대상이 된다.
그날 저녁,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교도소 집단 살해 뉴스 영상을 보면서도 월터는 무표정하다. 그의 악은 이제 일상적이고, 자동화된 실행이 되었다.
월터의 악은 이제 주저하거나 설명하는 과정을 생략한다. 누군가를 제거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끝난 문제다. 그는 선택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실행한다. 윤리는 이제 월터에게 방해물이 되었고, 망설임 없는 행동만이 남았다. 악은 생각을 거치지 않는 자동화된 패턴이 되어 있었다.
월터 화이트가 악을 향해 나아가던 길목에는 거스 프링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거스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다. 필요할 때 제거하고, 항상 깔끔하게 정리했다. 범죄를 산업화하고, 죽음을 규율화한 존재.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속에 미국 중서부 최대 마약조직을 교묘히 위장한 성공한 사업가. 초기의 월터는 그런 거스를 경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월터는 점점 그를 닮아간다. 설득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감정을 생략한다. 그는 한때 경계하던 바로 그 악의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악은 단순히 변질이 아니라 전염이었다.
월터는 언제나 정밀성과 완결성을 집착적으로 중시했다. 초기 메스 제조 과정에서도 그는 99% 이상의 순도를 목표로 삼았고, "94%는 쓰레기야"라며 저급한 제품을 경멸했다.
프링에게 일할 기회를 얻을 때, 그는 고급 환기 시스템, 온도 조절 장치, 무균 처리 가능한 제조실까지 요구했다. 메스 생산이 끝난 후에는 장비를 철저히 청소하고, 먼지 하나 얼룩 하나 남기지 않았다. 이 완벽주의는 시간이 흐르며 사람을 다루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월터는 메스를 제조하듯, 사람의 죽음을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설계하기 시작한다. 기술은 중립적이지만, 윤리 없는 기술은 악을 시스템화한다. 그는 이제 메스가 아니라 죽음을 공정처럼 다루고 있었다.
《브레이킹 배드》 시즌5 기차 강도 작전은 월터 화이트의 악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월터와 제시, 토드는 치밀한 계획 끝에 메틸아민 절도에 성공한다. 그러나 성공의 순간, 자전거를 탄 어린 소년이 나타난다. 토드는 망설임 없이 총을 쏴 아이를 죽인다.
충격적인 건 월터의 반응이다. 제시는 절망하고 경악하지만, 월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단지 주변 상황을 정리한다. 아이의 죽음조차 하나의 변수처럼 계산된다.
《브레이킹 배드》의 주요 각본가이자, 이 에피소드 “Dead Freight”의 집필자 겸 감독인 조지 마스트라스(George Mastras)는 그는 이 장면을 통해 "월터의 도덕적 마비가 완성되는 순간"을 그려내려 했다.
마스트라스는 이 장면에 대해 "시청자에게 조용한 충격(silent shock)을 주기 위해 연출했다"고 밝히며,
"토드의 총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월터의 무감각한 반응"이라고 강조했다
악은 개인의 결단만으로 자라지 않는다.《브레이킹 배드》 후반부의 월터 화이트는, 개인을 넘어 '시스템'으로서 악을 구현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명령 체계를 만들고, 부하들을 통제하며, 모든 행동을 효율적으로 조직한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그 시스템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은 양심적 판단의 여지를 잃어버린다.
《1984》에서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 체제의 본질을 이렇게 묘사했다. "당신이 믿든 말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복종이다." 그 아래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할 권리, 옳고 그름을 판단할 권리를 잃는다.
월터 화이트의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지배 하에서는 개인이 고민할 수 없다. 토드가 아이를 총으로 쏜 순간, 그는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논리에 따르면, 목격자는 제거되어야 할 리스크였을 뿐이다. 악이 시스템이 될 때, 더 이상 '나는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틈조차 없다.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발휘할 기회 자체가 제거된다. 그렇게 악은 더욱 거대하고, 견고한 괴물로 변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