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닳아 빠진 비유겠지만
감기다. 처음 미열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왜인지 모르게 나른했을 땐, 요즘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확실히 대처했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 그렇다 할 대책도 없을뿐더러, 조치를 취한다 해도 피할 수는 없었을 텐데.
참으로 닳아 빠진 비유겠지만은 감기에 걸려 허덕이다가 다시 헤어 나오는 일련의 과정들은 '이별'과 닮았다. 감기 증상이 완연 해 질 때 까진 감기가 온 걸 모른다.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 이미 감기에 걸렸구나' 혹은 '그건 감기 증상이었구나'같은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설명했다. 한참을 뜸을 들인 네 말을 듣고 나서야, 네가 오래전부터 나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의 삶에 매몰되어 너를 보지 못했다. 늦은 밤 너의 전화가, 어색한 새 머리와 그 옷차림들이 나의 시야에 닿으려던 네 몸부림이었구나. 감히 그때의 네 마음을 짐작해보고는 난 먹먹해졌다.
기침이 난다. 거북한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답답해 몇 번이고 기침을 하지만, 그놈의 점액은 끈적히도 가슴속 어딘가에 눌러앉아버린 모양이다. 속 시원히 긁어내고 싶지만 가슴팍을 열 수가 없다. 애먼 기침을 하도 해대는 판에 내 목이 남아나질 않는다.
'너에게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뿐이었다면 쉽게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느꼈을 깊은 쓸쓸함을 상상하자니 농도가 더 진해졌다. 그와중에도 넌 너를 온전히 던져 나를 사랑했음이 응어리를 더 끈적이게 만들어 내 가슴속에 눌러 붙였다. 너는 네 가장 여린 부분으로 나를 안았다. 나의 무심한 가시 마저도.
울음이 났다.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속 시원히 긁어내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괜찮냐는 사람들의 말에 미소를 지을 뿐 딱히 답할 말이 없다. 샤워를 하면 좀 나아진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조언을 듣는다.
감기는 약이 없다. 불현듯 다가와서 내 혼을 빼놓고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2주면 된다. 그땐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찰 것이다. 또다시 살아가고 또 감기에 걸리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