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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을리 없는 길이지만

미세먼지 속 평범한 회사원은 길을 잃었다.

by 김고양

지하철역 8번 출구, 첫 골목에서 좌회전. 그리곤 짤막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잠시 걸어간다. 이쯤이다. 낡은 차고 셔터 지나 전기줄 무성한 전봇대 옆. 여기 손바닥 만한 간판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아무래도 이쯤인데. 너와 함께 갔던 그 까페는. 애꿎은 핸드폰 지도만 다시 쳐다본다. 갈림길 하나 없는 직선의 골목길. 길을 잃을 리 없는 곳이다. 맥이 빠져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전히 뿌옇다. 한숨이 새어 나온다.

오늘도 흐린 하늘이다. 언젠가부터 세상은 미세먼지 투성이가 되었다. 사시사철 먼지가 이불 먼지터는 날마냥 잔뜩 떠다닌다. 폐 속 깊숙한 곳까지 먼지가 들어간다거나, 먼지가 뇌에 영향을 준다거나 하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다. 요즘 신경 쓰이는 점은 오직 하나, 먼지 때문에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먼지가 심한 어느 날이었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건너의 한강공원이 보이지가 않더라. 한강이 살아서 움직이거나 하지는 당연히 않으니, 잘못된 것이 만약에 있다면 그건 내가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거나, 빌어먹을 먼지 때문이겠지. 하지만 다리는 방향을 잃기엔 어려운 곳이다. 오직 하나의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곳이 바로 건너편이니. 그러니까 문제는 먼지일 테지. 그 먼지라는 놈 때문에, 당연히 있을 건너편을 그리워해야 하는 그런 생이다. 건너편을 볼 수 있다면 감사해야 하는 그런 날이다. 파란 하늘은 정말 드문 날이 되었다. 한겨울이나 한여름이나 되어야 파란 하늘을 볼 수가 있는데, 한겨울은 깨진 유리컵마냥 날카롭고 한여름은 민달팽이처럼 끈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파란 하늘을 온전히 즐기는 날은 추억 속에나 존재하는 게 되어버렸다. 마치 네가 날 이 골목 까페로 데리고 온 날처럼.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어느 가을이었다. 하늘은 유독 푸른빛이어서, 문득 올려다본 골목의 하늘은 마치 베네치아의 운하였다. 어디선가 괜찮은 카페를 알아왔다고 골목으로 날 잡아 이끌었다. 인쇄소와 아크릴 작업장이 즐비한 골목 한 켠 손바닥보다 약간은 더 크지만, 간판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작은 팻말이 있었다. 낡은 철문을 삐걱 열고 들어가니, 벽장의 LP판이 덜컥 우리를 맞았다. 일상에 찌든 회사원인 나는, 역시 너는 음악을 해서인지 이런 곳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지직대는 음악은 달콤했고, 창밖의 하늘은 맑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세상 사는 이야기. 연애와 결혼. 조만간 옮길 전셋집. 어렸을 적 팔았던 붕어빵. 아직 음악이라는 낭만을 놓지 않은 너의 이야기. 다른 직장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너에게는 생소한 회사원의 이야기. 푸른 하늘 보랏빛이 될 때까지 우린 음악을 듣고 서로를 들었다.


그런데 친구야 난 이제 까페 하나도 찾질 못하겠다. 갈림길은커녕, 작은 샛길조차 없는 일직선의 골목길. 길을 잃을 수 없는 곳이지만은, 이젠 인정해야겠지. 아무래도 난 길을 잃은 것 같다. 아무래도 빌어먹을 미세먼지 때문 인 것만 같다. 미세먼지 때문에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그래서인 것 같다. 나도 시선을 고정할 꿈이란 게 있었지. 낭만이라고 이름 붙이고 팽팽 놀아제낄 패기가 있었지. 못하는 소주 한잔 마시고 목이 터져라 노래 불렀던 그런 날들이 있었지.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걸까. 너는 놓지 않은 그 꿈을 놓아서 일까.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달랑 한 장 겨우 쓴 이력서로 겨우 자리 잡은 지 5년. 별다른 큰 걱정 없는 삶에 감사해야 하는데, 글쎄 난 잘 모르겠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꿈 팔아, 하나뿐인 몸 팔아 월급 받아먹는 인생. 너무도 평범해 나쁠 것 하나 없는 훌륭한 삶인데, 내가 걷고 싶었던 길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별걱정이 없어서 하는 배부른 소리인 걸까. 꿈도 세상도 원래 있던 거기 있을게 분명한데, 내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거니 아니면 먼지 같은 현실의 작은 조각들이 내 시야를 흐리는 거니. 그러니까 친구야. 나는 길을 잃은 것 같아. 음악이 들리는 곳으로 향하던 친구야. 너의 길은 아직 선명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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