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은낭가파르밧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일곱이었다.4번째 캠프는 7,650m였다. 캠프엔 삼촌의동료가 있었다. 삼촌은 8,070m에서 마지막 무전을 남기고실종되었다. 낭가파르밧은 8,125m니까 그에게 남았던 건고작 55m였다. 손에 잡힐 정도로 눈 앞에 있었을 텐데등을 돌려야만 했던 아쉬움이 그리 진한 것일까.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친구들은의아해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왜 안 나가냐는 물음에 그냥 몸이 좋지 않아 쉬겠다고 답했다. 일행을 보내고 숙소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하늘 끝엔 만년설 덮인히말라야의 조각이 보였다. 물론 저 산은 낭가파르밧이 아니지만은, 이정도라면 술 한잔 마실 정도는 되겠지. 글라스 두 개를 꺼내서 가득 따랐다. 평소 소주 반 병이면 속을 다 게워내고 뻗어버리는데 그날은 47도짜리한 병을 다 비울 수 있었다. 아마도 그와 나눠 마신 탓일 게다.
삼촌은 8남매의 막내였다. 할아버지는젊어서 떠났고, 할머니는 돈 벌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형제들이세상의 무게를 각자 진채 억척으로 자란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시골 먼지 틈바구니에서 삼촌은 억새처럼컸다. 사람에겐 억새꽃마냥 보드라웠는데, 꼬장꼬장한 집안에시동생과 시누이를 덤으로 얻은 형수들을 특히 챙겼다. 형수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 오고, 엎질러진 밥상에 '내가 날르다가 이래되었슈' 잘못을 대신 가져갔다. 사람이 순하기만 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유쾌하기가 이를 데 없어 엄한 아빠와 달리 조카들에겐 말 그대로 잎새 바람이었다. 손잡고 공원에 가고 목마를 타고 동네를 돌았다. 내가 조금만 더컸으면 좋았을걸. 그때 꿈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산이왜 좋았는지. 어쩌다 그 높은 곳에 올라갈 생각을 했는지.
삼촌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청춘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세상살이에충실한 건 매우 훌륭한 일이지만은, 그것을 초월해 꿈을 찾는 치기는 청춘의 특권이 아닌가. 슬프게도 삼촌의 시간은 설산에 멈추었으니, 나에게는 어찌 삼촌이청춘이 아닐 수 있으랴. 군대를 마치고 얼마간 막노동을 했다. 초겨울언 땅에 수도관을 묻고 받은 월급으로 핸드폰을 샀다. 보통 핸드폰 뒷자리 번호는 집전화와 같은 번호를쓰는 게 관습이지만 새로운 번호를 쓰기로 했다. 흘러가는 삶을 살아왔다. 더 이상은 싫었다. 누구나 그렇듯 이번 생은 처음이기에, 망망대해 선원들처럼 가늠하고 따라갈 북극성이 내게도 필요했다. 갓제대한 청춘의 복판에서 나는 낭가파르밧의 높이 8125를 골랐다.
어느 명절이었다. 차례를 지내고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물을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엄마는 대접에 냉수를 내왔다. 물병을가져와야지 그렇게 가져오면 어떡하냐는 아버지의 성화를 '입맛 없어 물 말아먹을라는데 잘했네'라는 내 말이 가로질렀다. 멋쩍은 엄마 손에서 대접을 받아 밥을 마는데큰엄마가 나직이 말했다. '쟈는 하는 게 막내 도련님을 꼭 닮었네.'명절의 아침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삼촌은 스물일곱 살에 고작 55m를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어느새 나는 삼촌보다도 나이가 많지만, 내 꿈은 아직도 요원하다. 아니지, 이젠 세상살이에 충실한 삶을 살기로 했다. 청춘을 살았던 그가 부럽고도 슬퍼서, 청춘을 보내버린 내가 부끄럽고도슬퍼서 밤을 지새운 날들이 있었다. 총 천연의 꿈을 잡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세상은 호락하지 않을뿐더러, 문턱에서 엿본 그 꿈이란 놈은 냉혹하기가그지없어 화장을 곱게 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현실을 외면한 꿈이 어렵기 마련이니, 꿈을 보내고 현실을 산다는 게 비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내 청춘의끄트머리에서, 이젠 삼촌보다 앞서 걷기로 했다. 그도 나도간 적 없는 길을. 내 가장 여린 부분을 내어 마주 할 서른의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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