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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 어딘가에 아직 삼촌이 있다.

히말라야의 초입에서 나는 술을 마셨다.

by 김고양

1학년의 여름이었다. 북인도의 끝자락에 도착해서는 숙소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보이는 설산이 히말라야 산맥이 맞냐고. 그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이미 해발 3000미터라고 히말라야에 온걸 환영한다 말했다. 그래 한국땅에서는 오를 수 없는 높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 나는 직원에게 혹시 한국 술을 파느냐고 물었다. 혹은 일본 술도 괜찮으니 있으면 좀 달라고. 소주도 정종도 구할 수 없어서 맑은술은 가진 게 뭐가 있느냐 물었더니, Bombay sapphire gin을 줬다. 40도짜리 맑은술을.


삼촌은 낭가파르밧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4번째 캠프는 7,650m였다. 캠프엔 삼촌의 동료가 있었다. 삼촌은 8,060m 지점에서 몸이 안 좋다는 무전을 남기고 캠프로 돌아오다가 실종되었다. 낭가파르밧은 8,125m니까 고작 65m다. 손에 잡힐 정도로 눈 앞에 있었을 텐데, 등을 돌려야 했던 아쉬움이 그리 진한 것일까.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왜 안 나가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그냥 몸이 안 좋다고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일행을 보내고 숙소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하늘 끝엔 만년설이 덮인 설산이 있었다. 물론 저 멀리 보이는 산은 낭가파르밧이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술 한잔 마실 정도는 되겠지. 글라스 두개를 꺼내서 가득 따랐다. 평소 소주 반 병이면 속을 다 게워내고 뻗어버리는데 그날은 40도짜리 한 병을 다 비울 수 있었다. 아마도 그와 나눠 마신 탓일 게다.


어느 명절이었다. 차례를 지내고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물을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엄마는 대접에 냉수를 내왔다. 물병을 가져와야지 그렇게 가져오면 어떡하냐는 아버지의 성화를 '입맛 없어 물 말아먹을라는데 잘했네'라는 내 말이 가로질렀다. 멋쩍은 엄마 손에서 대접을 받아 밥을 마는데 큰엄마가 나직이 말했다. '쟈는 하는 게 막내 도련님을 꼭 닮었네.' 명절의 아침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삼촌은 8남매의 막내였고 할아버지는 젊어서 떠났으니, 학창시절의 삼촌을 키운 건 큰엄마였다. 꼬장꼬장한 남편에 시동생과 시누이는 덤이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던 삶이 서러울라 치면, 위로는 꼭 삼촌이었다고. 형수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 오고, 엎질러진 밥상에 '내가 날르다가 이래되었슈' 잘못을 대신 가져갔다고 한다.

낭가파르밧에 가겠다는 삼촌에 말을 듣고는 큰아버지는 밥 해먹이면 저놈의 새끼 힘나서 산에 가니까 굶기라 했다고 한다. 한라산 등산로 공사에 널빤지와 시멘트를 지고 올라가 경비를 벌어온 마당에 굶기면 어쩌나. 큰아버지 몰래 반찬을 실하게 차려주다가 걸리는 날엔 호통이 집을 떠나갈 듯 몰아쳤는데 출국 전날엔 결국 큰아버지도 '너 일나면 난 엄니 아부지 죽어서도 못 본다' 한마디를 남기고 닭을 삶아 먹이라고 시켰다. 그때 닭이 부실했었나. 큰엄마는 아직도 그게 마음이 아프다. 실한 놈을 삶었으야 힘나서 돌아왔을 것인디.


삼촌은 스물일곱 살에 고작 65m를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어느새 나는 삼촌보다도 나이가 많지만, 내 꿈은 아직도 요원하다 아니 이젠 꿈이 어딨는지도 찾을 수 없다. 청춘을 살았던 그가 부럽고도 슬퍼서, 청춘을 날려버린 내가 부끄럽고도 슬퍼서 오늘은 밤을 지새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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