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중이었다. 아버지께서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셨다. 진한 청국장이 생각나는 맛이었다.
"여기에 청국장 섞으면 진짜 맛있겠는데?"
"장 섰어. 저기 4단지"
"아 그래?"
"거기서 청국장 한 개만 사 와" "이렇게 싸여있는 거"
아빠는 손으로 한 덩이 시늉을 한다.
"아~ 랩으로 싸놓은 거?"
"알겠슈"
"너 좋아하는 것도 사올라면 사 오고"
"뭐?"
"떡볶이… 순대…"
"아빠 먹고 싶어?"
"아니 먹을 거면 아빤 맛만 보고"
아빠는 요즘 다이어트 중이다. 식사도 아닌 간식거리를 덥석 먹자고 하기는 죄책감이 드니까 저러시는 거겠지. 나는 사흘 뒤에 한국사 시험 예정일이다. 우리 집은 프린터가 없는 관계로 문구점에 가야 수험표를 출력할 수 있다. 집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 근처에는 문방구가 있으리라. 오래된 문방구는 네이버 지도에는 절대 안 나온다. 누군가한테 물어봐야지. 초등학생 한 명, 두 명, 한 명, 세 명. 어린 학생들이 이따금 몇 명씩 짝짓거나 혼자서 하교하고 있었다. 마스크 쓴 아이도 있고, 쓰지 않은 아이도 있었다.
'초등학생한테 물어보는 건 오바겠지?'
'아동성애자 같은 거로 오해받을라'
할머니 한 분께서 지나가셨다.
"선생님, 저 이 근처에 문방구 있습니까?"
"어어, 여기가 초등학교니께" "저짝 새마을금고 옆에 있어요"
말씀으로는 우측인 것 같은데, 손짓으로는 왼쪽을 넌지시 가리키시는 것 같았다. 헷갈리면서도 문방구를 찾아가니 아이들로 북적였다. 프린트 업무는 하지 않으신단다. 나는 곧장 수서역으로 갔다. 지하상가 모닝글로리에 들렀다.
"수험표 출력 되나요?"
"안돼요" "카피랜드 가보세요"
카피랜드에 갔다. 수험표 출력 되나요? 마스크 쓰신 사장님은 고개를 내저었다. 알파에 갔다. 안 해요. 사정이라도 해볼까 싶어 손님 빠지기를 기다렸다. 손님이 다 빠지고 나서 사장님은 아까보다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저희가 인터넷 연결해서 하는 거는 못 해 드려요. 여기 밑에 모닝글로리 가보세요. 아 네. 모닝글로리에 다시 갔다. 3번이나 퇴짜맞은 이야길 하니 1층 보라 디자인에 가보란다.
"수험표 출력되나요?"
"컬러요 흑백이요?"
"…" "컬러요"
보라 디자인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요새는 프린트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매번 피시방엘 갔다. 이용료 1,000원에 프린트 값 300원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도서 리뷰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저번 주에 주문한 책이 어제서야 도착했다. <일상의 짧은 글>이라는 에세이집이다.
'이 책을 블로그, 카페, SNS 등에 소개해주세요.
택배비 2,500원을 돌려드립니다!'
리뷰를 쓰면 돈을 돌려준다고 명함에 쓰여 있었다. 교통비와 프린트값을 여기서 뽕 뽑아야겠다. 개요를 잡고 나니 4,000자가량이었다. 분량이 길다 싶어 500자를 줄였다. 성의있게 쓰고픈 마음에 처음부터 다시 읽고 고치기를 여러 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잠시 누웠다. 머리 식힐 겸 산책하기로 했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를 지났다. 횡단보도를 건넜다. 짧은 다리를 건넜다. 건너면 기깔나는 정자가 하나 있다. 옆을 보니 웬 낯선 천막이 보였다.
"아! 장날이었지"
깜빡했다. 최근에 '장'이라는 것을 듣도 보도 못했던 터다. 아파트 단지 외곽에 파란 천막이 일렬로 들어섰다. 중간에 열린 지퍼로 들어가니 건어물 좌판이 있었다.
"청국장 있어요?"
"여기요"
"얼마에요?"
"언니! 청국장 얼마야?"
"3개 만 원 1개 사천 원"
언니가 대답했다.
"계좌이체 되나요?"
"카드도 돼요"
언니가 대답했다.
"제가 산책하던 중에 온 거라…"
"계좌이체도 돼요"
"신한 110 … …"
"3개 사서 냉동실에 넣고 먹음 좋은데"
할머니보다는 '노파'라는 명사가 어울릴 것 같은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장사라기보다는 구경 나오신 것 같다. 어릴 적 이유 없이 놀이터에 나가는 아이와 같이, 이 할머니는 이유 없이 장터에 나온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보는 친구 할머니마다 말을 건네신다. 웬 지팡이야? 다리가 더 안 좋아졌어? 어 넘어졌어. 저 할머니의 역할은 무엇일까. 어쩐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황야의 마녀'가 연상됐다. 코는 덜 익은 딸기처럼 분홍빛이 감돌고 눈 밑과 턱밑은 비슷한 폭으로 늘어나 있다.
나는 장을 오랜만에 둘러보는 게 신기해서 구석구석 두리번거렸다. 천장은 스틸로 고정이 되어있다. 얼핏 사다리 재질 같기도 하다.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낮았다. 끝쪽은 채소 과일 구간이었다. 상인은 야채 이름과 가격을 번갈아 말한다.
'여긴 홈플러스보다 싸겠지?'
'어떻게 경쟁력을 유지할까?'
우리 아빠는 영세상인 마니아다. 내가 '편리'와 '경제성'의 논리를 들먹이며 물들여놓기 전까지 아빠는 이마트나 롯데마트, 홈플러스 입구도 구경하지 않으셨다. 최근에 회사택시를 나오시고 개인택시를 몰고 계신다. 아빠는 기회만 되면 전 회사 앞 영세 슈퍼에 꼭 들러 이것저것 장을 봐온다. 지극한 영세 사랑이다.
예전에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이렇게 장이 열리곤 했다. 수요장, 금요장이라는 이름이었던가. 새록새록 어렸을 때 기억이 난다. 나는 꼬맹이라 직접 무얼 산 기억은 없다. 가끔 닭꼬치나 떡고치를 손에 들고 롤러블레이드를 탔다. 사라져가는 것들이다. 언제까지 장이 설까? 언제까지 장이 설 수 있을까.
장터를 나오는 길에는 어물이 있었다. 비린내가 향긋하다. 지나고 보니 마지막 관문은 포장마차다.
'아빠가 신신당부했었지'
다이어트하는 사람이 '한 입 먹겠다'면 그건 천 번 만 번의 부탁이라고 할 수 있다. 옥수수가 먹음직스러워 1봉지, 순대와 떡볶이 1인분씩 주문했다.
"계좌이체 되나요?"
"네 됩니다"
"기업이구요"
"…"
"네 기업…"
"010 … …"
핸드폰으로 개설하셨나 보다.
"8000원…"
"보내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띵동하는 알림이 울렸다.
"받았습니다"
"이건 부수입이에요"
주인아주머니는 뿌듯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수입이요?"
"네 카드 결제하면 세금이 나가잖아요"
"이건 통장에 직접 들어오니까 부수입이죠"
"아... 좋네요"
머릿 속에서는 궁금증이 일었다.
'개당 팔면 세금이 얼마인데요?'
'카드 결제한 거랑 어떻게 차이가 나나요?'
돈 얘기가 나온 김에 물어볼 수야 있겠지만, 오지랖인듯싶어 말을 머금었다. 봉투를 들고 자리를 떴다.
'얼마나 차이가 나나요?'
'언제까지 장이 열릴 수 있나요?'
'언제까지요?'
20.02.06
「"아! 장날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