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땅을 보고 걷고 있었다.
무미건조하고 중립적으로 그냥 보고 걸은 것이 아니라
땅을 보고 걷는 것을 상당히 즐겼던 것 같다.
특히나 하얀 보도블럭과 빨간 보도블럭, 그리고
그 사이에 피어난 잡초같은 것들.
횡단보도의 하얀 부분과 까만 아스팔트.
어떤 색깔을 밟으면 죽는다거나
어떤 부분 바깥은 상어가 들끓는 바다라거나
혼자만의 세계관을 설정해서
혼자 잘 놀았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나는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류가 사족보행을 하다가
갑자기 이족보행을 하게 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나서부터 나는
내가 땅을 보고 걸었다는 것에 대하여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이제 성인이 되었다.
갓 성인이 된 것도 아니고,
30대가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내가 HSP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내가 남들과 달랐는지
어렴풋이 더 알게 되었다.
ADHD와 우울증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었다.
거기다가 HSP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지구를 반대편으로 항해해서
신대륙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땅을 보고 걸어보았다.
정말 좋았다.
목이 기울어서
거북목이 될 것 같은 염려가 드는 것 빼고는
정말 좋았다.
정면을 볼 때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시각 정보로 인식된다.
이때 나의 예민한 감각기관은
금세 피로해진다.
하지만 거북목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땅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보이는 것은 바닥의 타일뿐이다.
이때 나는 굉장히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퍼즐이 풀린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여전히 내성적인 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는 잔재가 남아있다.
언젠가는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가위로 잘라낸 적도 있다.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땅을 보고 걷는 아이
땅을 보고 걷는 어른
여전히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왜 그런 아이일 수밖에 없었는지
나 스스로
어렸던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너를 이해해.
세상 모두 네가 바뀌어야된다고
더 외향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더라도
나는 너를 바꾸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