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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후생 Mar 08. 2020

허명 虛名



  눈을 떴다. 핸드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후 중천일 거다. 어제 새벽 네 시 반에 잤다.


  '불규칙한 생활을 청산하고 싶다'


나에게는 '불규칙 플래그'가 있다. 플래그는 특정한 결과를 예측하게 하는 유형화된 원인을 말한다. 사망 플래그라고 함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의 특정한 대사나 행동으로 죽음을 예측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공포 영화에서는 단독 행동을 하는 캐릭터가 일찍 죽는다. 


  어떤 일련의 결과는 미처 통제하지 못했던 단 한 번의 행동이 촉발한다. '딱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하고 평생 끊자' 이런 생각으로 허용한 행동은 '밤샘'을 낳았다. 이번 한 번을 허용하면, 다음 한 번도 허용할 가능성이 높다. 한 번의 행동을 허용하면, 하루를 통째로 허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고치기 힘든 습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불규칙적으로 변한 생활을 규칙적으로 회복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늦은 수면은 불규칙의 결과는 아니었다. 어젯밤 유독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우울했다. 나는 '우울'이라는 말을 극도로 혐오한다. 말에는 위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울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거나 떠올리기만 해도 '우울감'에 잠식당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에는 접착성이 있어 끝없는 우울의 늪에 빠질 것을 경계한다. 나는 우울의 멸균 상태에서만 행복을 믿을 수 있다.


  이러쿵저러쿵 기분 전환을 하려 노력했다. 우울한 감정을 끌어안은 채 잠들기는 싫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모든 우울증 환자들이 이런 기분을 느낀다면, 아무리 노력한들 병증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명치끝이 괜스레 아릿했고, 기분은 다운됐다. 즐거운 것을 봐도 왠지 서러웠다. 노래는 슬프게 들렸다. 우울감을 부추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울이 찾아오기 전, 나는 인터넷 서핑을 했다. 우연히 화류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구인 사이트를 봤다. 전혀 연관 없는 검색어였다. 소설을 쓴다면,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 같아 게시글을 유심히 살폈다. 텐프로라느니, 키스방이라느니 하는 어둠의 단어가 보였다. 어떤 게시글에는 누군가의 실제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언급됐다. 자신은 이 사람 업소 월급을 안다. 외제차에 명품을 두르고 다닐 수 없는 사람이라며, 이 사람의 정체 혹은 외제차와 명품의 출처를 아는 이가 있느냐는 글이었다. 댓글은 '스폰이겠지, 뭐' 대수롭지도 않다는 투였다. 유튜브에는 '인스타그램 스폰서 알아보는 법' 영상까지 있었다. 


  누군가를 '그런 사람'으로 분류해 거르는 것은 섣부른 행동일 수 있다. 또, 익명의 게시판에서 누가 어떤 의도로 글을 올렸는지 해커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다. 누군가의 계정을 저격하는 것은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위험한 행동이다. 나는 당연히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음해인지 아닌지까지는 알 수 없다. 이 사람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런 식으로도 살아가겠거니, 소득 없는 의혹만 남았다.


  나는 그 사람의 계정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나에게 스며드는 묘한 패배감을 감지했다. 인스타그램에서 혹자는 팔로워를 돈으로 산다. 다른 SNS도 마찬가지다. 마케팅은 오로지 마케팅만으로 성립하지 않을 때도 있다. 계정을 사고팔기도 한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과 SNS에서 경쟁한다는 사실만으로 기운이 쭉 빠졌다.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닌데, 참 쉽게 명성을 얻는다. 돈 벌기 참 쉽다, 싶었다. 


  부러울 것은 없다. 팔로워는 백만이 넘지만, 실제로 포스트에 호응하는 것은 몇천, 몇만에 불과했다. 나머지 구십 혹은 구십구만 명은 유령 계정이다. 더불어 친구는커녕 한국인 댓글도 없다.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렸지만, 진정한 사귐도 진정한 소통도 없다. 부러울 리 없는데도 나는 어쩐지 더욱 분명히 패배감의 쓴맛을 느꼈다. 인스타그램이 사람의 자존감을 크게 떨어뜨리는 매체라던데, 이 기회에 끊어야 하나.


  그런 거래가 오고 간다는 사실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순수한 인식과 순수한 관점을 되찾고 싶다. 명성은 순수한 노력으로 얻는 거라는 그 믿음이 흔들렸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속는다. 허명, 누군가가 얻은 허명에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우울하다. 누군가는 속아 그 속에서 허우적대겠지. 빛나는 사람 곁에는 언제나 바람잡이가 있다. 심어놓은 사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나에게 전해지는 것이 항상 자연스러운 흐름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인위적인 것을 인위적인 것으로 알아 차라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떤 프레임 안에 갇혀있다.


  나는 실패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내가 견지했던 편협한 사고를 반성했다. 실패자들은 정직했을 뿐일 수도 있겠구나. 누군가는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경쟁한다. 그것은 진정한 경쟁이라고 볼 수도 없다. 누군가는 그런 식으로 돈을 번다. 성공한다. 음원을 사재기하듯, 팔로워를 사고판다.


  네이버 블로그를 하면서였다. 수천, 수만 명의 이웃을 가진 이 사람. 내 게시글에 하트를 누른다. 그는 더 많은 이웃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더불어, 수만 명의 이웃이 하루에 올리는 글을 체크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이 사람은 진정으로 내 블로그까지 찾아올 여유가 있었을까?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검색? 알고리즘? 돈? 나의 마음에 불쾌한 파문이 일었다.


  당신은 일하는 시간이 언제고, 일하지 않는 시간이 언제일까? 좋아요를 누른 이 시점에서 당신은 정말 컴퓨터나 핸드폰 앞에 있기는 한 걸까? 직접 내 블로그에 와서, 직접 내 게시물을 읽었을까? 내 블로그에 찾아왔으니 감사히 답방을 가고, 좋아요를 한 번 눌러줬으니 답례로 나도 좋아요를 눌러주면 윈윈으로 그만인 걸까?


  그 사람은 내가 쓴 글에 좋아요를 남겼지만, 읽은 후기도 감상평도 남기지 않았다. 심증만 커질 뿐이다. 매사에 의심하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의 온라인상 전략이거나 매크로일 수도 있고, 진짜 인간의 방문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프로그램이 나에게까지 찾아왔다면, 나 정도의 게시물을 가진 사람, 나 정도의 방문자 수를 가진 사람, 나 정도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 군(群)은 이미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방문과 좋아요, 후기도 감상평도 아닌 애매한 이모티콘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블로그에는 간단한 포스팅으로 가득했다.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긁어온 사진 몇 장. 태그와 최적화와 광고를 노리고 쓴 키워드. 본문은 알맹이 없이 텅 비어있었다. 그런 글에 좋아요가 수십 개씩 찍혀 있었다. 댓글도 같았다.


  '답방 와주세요'

  '오늘도 화이팅'

  

형식적인 인사와 어떤 글에도 무난히 어울릴 말들의 버무림. 본문은 읽었는지, 진짜 사람은 맞는지, 무엇을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내용도 없는 껍데기 같은 블로그에 댓글을 달고 이웃을 맺을까.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내 마음은 진창에 빠졌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의심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블로그를 화원처럼 꾸미며, 글을 심고 소중한 인연이 피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눈을 떴다. 햇살은 방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마른빨래가 그대로 있었다. 어제 아빠가 나를 대신해 개어주셨다. 그 모습 그대로 전기장판 위에 두고 옆에서 잠들었다. 빨랫감은 햇살을 받아 부분적으로 빛이 났다. 검은 속옷, 회색 운동복, 빨간색 맨투맨, 노랑 파랑 초록의 대학교 70주년 기념 티셔츠가 알록달록 부분적으로 빛났다. 햇빛이 찾아오면 먼지의 존재는 들킨다. 먼지는 천천히 부유했다. 그 모습은 화려한 무대에 꽃가루가 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늦게 일어나 하루를 엉망으로 시작하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핸드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자장가로 고른 느린 템포의 노래였다. 기타를 아르페지오 주법으로 한 가닥 한 가닥 튕기는 소리가 청량했다. 느릿한 가수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소파처럼 아늑했다.


  밤을 새울 때 나는 항상 죄책감을 느낀다. 늦게 일어날 때 나는, 늦게나마 일어날 수 없을 때가 있다. 늦게 일어난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어, 나는 잠 속으로 더 깊은 잠 속으로 도망치곤 한다. 그럴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아버지가 계실 것이다. 나는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으로 비난받을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실제로 비난받은 것도 아니고,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지만 그것이 두려워 이불속에 머문다. 지금이라도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데. 오늘 하루는 망쳤으니, 내일부터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면 나는 더더욱 일어날 수가 없다.


  나는 이런 일련의 쳇바퀴 같은 생각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행동이 밤샘을 낳듯이. 밤샘은 늦은 기상을 낳는다. 늦은 기상은, 더욱 늦은 기상을 낳으며 행동불능과 쌍둥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비관하는 생각의 악순환과 친구다. 그들은 희망을 따돌린다. 이래서야, 돈으로 뭐든 사는 사람들을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다.


  해리포터에게는 디멘터를 만나 꼼짝 못 할 때 외치는 주문 '익스펙토 펙트로눔'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마법 주문이 있다. '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 어떤 비관적인 생각도 끼어들지 못하게 머릿속을 빛의 주문으로 가득 채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희망을 괴롭히던 무리는 자취를 감춘다. 엉망으로 시작된 오늘이라도, 미지의 영역이다. 트랙을 달려보기 전까지는. 땅을 개간해보기 전까지는. 내가 몇 등으로 골인할지. 어떤 수확을 거둘지 알 수 없다. 


  게임을 하다 렉이 걸려 튕길 때가 있다. 다시 접속하면 내 캐릭터는, 정상적으로 플레이한 사람의 캐릭터보다 능력치든 아이템이든 뒤떨어진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판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 뭐라도 해야 뭐라도 건질 수 있다. 쉽고 괴물 같은 성장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척박하더라도 영혼이 성장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가겠다. 나는 우울감을 내 손으로 극복할 것이다.
























「허명」  20.03.0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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