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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후생 Mar 07. 2020

필사 筆寫  즉생 則生



   벼르고 벼르던 필사를 했다. 


"내일은 12시부터 6시까지 카페에 있을 거니까 그 전이나 후에 통화하자"


여자친구에게 미리 언질까지 줬다. 언젠가 날을 잡아 책 한 권 필사하리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집에서 3분도 안 될 거리에 있는 카페의 문을 왼쪽 어깨로 지그시 밀었다. 카페 모카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견본이 될 《리추얼》과 노트, 필기구를 꺼냈다. 모카를 시켰는데, 라떼를 주셨다. "죄송해요" 모카로 바꿔주신다 그런다. "둘 다 좋아해요" 그냥 먹기로 했다. 


  마음 같아선 죙일 쓰면 전체를 필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4시간 동안 겨우 서문까지 썼다. 목차 바로 전이다. 그때 깨달았다.


  '아, 필사란 이런 것이구나'

  '그래서 고종석 선생님이 필사는 추천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군'


고종석 선생님은 기자, 언어학자, 소설가로 유명한 달필가다. 글쓰기의 모범이라 생각하며 존경하는 분이다. 그분의 글을 읽을 때 여전히 난 두근거린다. '평범함이랑 거리가 먼 분이시니까, 나에겐 필사가 맞을 지도 몰라' 생각했다. 필사를 적극적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어느 만화가의 말 때문이다. 


  "가장 빨리 그림 실력을 늘리는 길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만화책 3권을 그대로 베끼는 겁니다"


극화 만화로 유명한 김성모 작가의 말이다. 그림이, 만화가 그렇다면 글도 그렇지 않을까? 신경숙과 김영하는 소설가 김승옥을 필사했다고 한다. 필사가 두 소설가의 필력에 분명 이바지한 바가 있으리라.


  《리추얼》은 소설가, 시인, 극작가, 화가, 철학자, 영화감독, 과학자 등 여러 유명인의 일상 루틴을 담은 책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따르는 루틴을 꾸려보자는 생각에 구입했다. 1년 넘게 묵히다 어제 본능적으로 꺼내 외출 가방에 넣었다.


  오늘 내가 한 것은 '통필사'다. 필사는 베껴 쓰는 것이다. 적힌 그대로 옮긴다는 뜻이다. 통필사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적힌 그대로 베껴 옮겨 쓰는 것이다. 그동안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문단을 메모(부분 필사)한 적은 있어도 통필사를 해본 적은 없다. 표지부터 시작했다.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리추얼.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 메이슨 커리. 강주헌 옮김. Daily Rituals. 책읽는수요일. 날개 글도 필사했다. 그들은 특별한 일탈에서 영감을 얻기보다는 더 깊이 자신의 일상을 파고들었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레베카를 위하여. 분명 작가인 메이슨 커리의 주변인이리라. 다음으로 추천사.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추천사가 있었다. 이것은 별로 옮기고 싶지 않은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도 통필사를 각오했으니 써보자' 다짐했다. 다음은 서문이다. 훨씬 영양가 있었다. 서문 다섯 쪽에 걸쳐 일곱 문장을 빼고 다 밑줄 쳤다. 


  총 일곱 쪽을 옮기는 데만 네 시간이 걸렸다. 배가 고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식으로 마카롱 하나를 먹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카페 문을 몸으로 밀어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도로에서 아주머니가 보였다. 같은 방향에 같은 속도로 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아주머니를 자세히 관찰하는 기회가 됐다. 짧은 머리를 하고 계셨다. 숏컷 이상으로 짧았다. 뒷머리는 뜨지 않고 목에 잘 붙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아주머니라는 것을 모를 것 같았다. 상당히 특이한 패션을 하고 계셨는데, 그게 트렌디한 건지, 트렌디하지 않은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이런 경우 보통 '시대를 앞서간다'고 하지 않나?


  그분은 어두운 보라색 노스 패딩을 입고 있었다. 바지는 검은 바탕에 흰 줄무늬 아디다스 츄리닝이었다. 모자는 밝은 회색 비니를 쓰셨다. 나는 잠시 넋 놓고 그분의 패션을 바라보았다. 탐나는 패션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에는 청소년이 입었지만, 지금은 뭔가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요즘도 노스 패딩이 나오나요?"


마스크를 쓰고 있던지라 목소리가 제대로 안 들리셨는지, '요즘도 노스'까지는 미동도 없으셨다. 그러다 '패딩'이라는 단어에서 날 인식하셨고, '이 나오나요'에서 내 쪽을 돌아보셨다.


  "안 나올걸요?"


빈정거림으로 들으실까 싶어, 한 마디 덧붙였다. "너무 멋지셔서요"


  "아 예 ㅋㅋ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필사를 해서일까. 카톡을 할 때나 사물을 바라볼 때나 평소보다 깊이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주변 사물과 풍경의 달라진 감각을 하나하나 알아채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공동현관 앞에는 아이들 둘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연두색 상의를 입은 남자애는 자꾸만 말했다. "먼저 해" "먼저 서브 넣어"


화가 조금 섞인 목소리다. 반대편 여자애가 고집쟁이인가 보다. "니가 쳐"


남자애가 자기 앞에 떨어진 공을 들어 또 먼저 친다.



        ↖

             틱

                 

                 

         틱    

             ↘

              

              

         ↖

              틱



여자애 눈앞으로 공이 날아갔다. 아이는 자기 차례에서 공을 놓치고 말았다. "아이, 순간 눈의 초점이 흐려졌어" 아이는 난입한 관중인 나를 의식하며 중얼거렸다.


  '흐려지긴 ㅋㅋ 어떻게 눈의 초점이 흐려져 ㅋㅋㅋ'


나는 마스크 속에 웃음을 숨기며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필사 筆寫 즉생 則生」  20.03.07.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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