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플레이어원 보고 왔다
초등학교 때, 우리 어린이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명화의 양대 산맥이 터미네이터와 쥬라기공원이었다. 공룡이냐 로봇이냐, 아놀드냐 티라노냐(?)의 대결은 스필버그냐 제임스 카메론이냐.로 귀결되곤 했다. 터미네이터를 너무 좋아해서 별명이 터미네이터였던 오빠의 영향 탓인지 나는 침을 튀기며 제임스 카메론의 편을 들었다. 스필버그 좋아하는 건 구린 거라고 단언하고 스필버그 좋아하는 애들은 취향이 형편없으며 감각이 떨어진다고 외쳤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임스 카메론은 자기 세계를 자기가 만들고 있는 작가다. 쥬라기공원은 마이클 크라이튼 원작이니까. 소설도 대박이었고 유명하니까. 물론 스필버그도 대단한데, 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의 세계를 만든 사라 코너와 존 코너의 아버지잖아. (급기야 나중엔 나비족 언어까지 만드심)
두 번째는, 제임스 카메론이 추구하는 100%의 완벽함.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영화적 재미와 뛰어난 영상미와 독창적인 세계관과 아름다운 음악과 훌륭한 캐릭터 및 연기의 총합으로, 궁극의 재미와 감동을 지향해 왔다. 터미네이터든 트루라이즈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 분. 상이 전부는 아니지만 제임스 카메론을 "킹 오브 더 월드"로 만들어 준 영화 타이타닉은 위에서 말한 그 모든 것이 모였을 때 만들어지는 가장 완벽한 결과물의 실체를 보여준다. 그래서 블록버스터 영화에 짜게 굴었던 아카데미도 제임스 카메론이 세계의 왕이라는 걸 인증해줬다. (다시 한번 상이 전부는 아닙니다요.)
그런데 스필버그의 영화는 감동이 목적인 영화, 가끔은 상을 받으려고 만든 것 같은 영화, 흥행을 노리는 영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100%라는 느낌이 아니다. 영화마다 지향점을 정해 두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아 보인다. 93년에 쉰들러 리스트, 98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영화감독이지만, 제임스 카메론의 작가주의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상은 어렸을 때 - 대학생 때쯤까지 - 했던 생각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성향은 아바타 2009년 개봉 이후 2편을 2020년에 내놓겠다는 계획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못 믿겠음. 그 사이 스필버그는 우주전쟁, 링컨, 스파이브릿지.. 얼마 전에 본 명작 더포스트까지 쉴 새 없이 재미있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누가 더 뛰어나냐. 사람마다 답은 다를 것 같다. 당연히 정답도 없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지난 수년간 기쁨을 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제임스 카메론이 아니고 스필버그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바타만 돌려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더 포스트 보고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다음으로 보고 싶은 영화가 또 스필버그 영화였다. (놀라워라) 그것도 80년대 덕후들의 감성이 21세기 VR 게임과 만난 작품 레디 플레이어 원. ET와 인디아나 존스를 만들고 백투더퓨처를 제작한 80년대의 기획자가 80년대 감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우선 크레딧은 줄 수밖에 없겠다. 원작이 있는 작품이지만 연출하기를 결정한 건 감독님이니까요.
영화는 알려진 대로 대중문화 덕후인 게임 설계자 제임스 할리데이가 사후 유산으로 남긴 게임 소유권을 얻기 위해 2045년의 청소년들이 게임 속의 추억 퍼즐을 풀어 나가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이 사람을 사서 하루 죙일 게임을 시키는 방식의 물량 공세로 게임 세계를 정복하려 하는데... 우리의 힘없는 청소년 주인공은 덕후력만으로 (게임)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 덕후들 사이에서는 "감히 니가 뭔데"라는 반발을 사면서 약간 욕을 먹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필버그한테 감히라니;;)영화사에서 80년대 덕후들에게 홍보를 하려고 '오마주 포스터'라는 이름으로 블레이드러너, 구니스, 매트릭스, 비틀주스, 백투더퓨쳐 등 유명 영화 포스터를 패러디했는데 그것도 엄청나게 욕을 먹고 있다... 나의 소중한 추억을 너의 홍보에 이용하지 마! 느낌.
어렸을 때 나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그 추억 속의 마티 맥플라이와 드로리안이 2045년의 게임 아이템으로 등장하는 것, 눈물 콧물 다 흘리게 했던 아놀드 터미네이터의 장엄한 죽음이 게임 캐릭터가 죽는 과정에서 재미 혹은 멋으로 소비되는 것. 비틀주스와 닌자 거북이, 건담은 '게이머떼'의 일부로 병풍처럼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 그런 것들이 싫다는 느낌..은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나는 한 시대의 문화를 창조한 작가들의 캐릭터를 곳곳에 던져 놓으면서도 태연한 스필버그가 오히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담담하게; 남이 만들어 놓은 캐릭터, 남이 만든 이야기로 빈틈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결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능력. 나는 영화감독이고 영화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말하기라도 하는 듯. 어린 시절엔 주제넘게 스필버그가 제임스 카메론이나 로버트 저메키스를 부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당연하지만 스필버그는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듯하다. 세계에서 영화 제일 잘 만드는 사람. 영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닌 영화감독의 대명사. 스필버그.... 140분이나 되는 긴 영화를 보는 내내, 1초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영화가 몇 분짜리인 줄 모르고 극장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해가 져 있었다..; 한 90분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 장면 일부는 빼도 될 것 같지만)
좋아하는 터미네이터인데 패러디 장면이 나올 때 재밌고 신나기만 했다. 뭐야 우리 터미네이터를 왜 이런 식으로 소비해! 그런 생각이 들 틈이 없었다. 이미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에 몰입해 있었으니까. 주인공 웨이드, 사만다 응원하느라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레전설 캐릭터들을 떠올리면서 터미네이터와 백투더퓨쳐, 비틀주스를 다시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아하의 테잌온미는 며칠 연속으로 들었다. 적어도 나에게 이 영화는 추억팔이보다는 추억 앰플리파이어다. 신났고, 즐거웠다. 스필버그 감독님,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