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이 끝은 아니야

코코 보고 왔다

by 하나김

얼마 전 회사에서 죽음에 관한 책을 발간했다. 서울과 파리를 비교하면서, 죽은 자를 기억하고 삶을 성찰하는 공간으로서 묘지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다룬 책이다. '적당한 거리의 죽음' 이라는 제목인데, 죽음이 주제이고 제목에도 들어가는 책을 내는 게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책에도 나오듯,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피해야 할, 생각하기도 싫은, 무섭고 두려운 '사건'에 가깝다. 삶의 연장선이자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코코는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죽음은 인생의 종착지라기보다는 과정이고 일부이다. 꽃잎이 무수히 쏟아지는 다리로 연결된 아름답고 화려한(!) 사후세계에서는 비록 몰골은 해골이지만 살아있을 때 이상으로 신나게,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동물들은 이승에서보다 더 예쁘고 귀여운 모습으로 특수한 능력까지 탑재하고, 여전히 사력을 다해 우리를 반겨주고 있다. 저승은 사후세계라기보다는 미래 세계, 환상의 세계에 가까운 모습이다. (멕시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멕시코 멋있다.. 만나고 싶다. 멕시코인. 가고 싶다. 멕시코.)


멕시코의 큰 명절인 '죽은 자의 날'은 우리나라의 설이나 추석 명절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을 제단에 올려놓고 음식을 대접하는 건 똑같다. 그런데 화려한 꽃으로 수놓은 거리에 해골 분장을 한 사람들이 음악 경연 대회를 여는 파티 분위기는 숙연+엄격을 요구하는 우리 제사 문화와는 거리가 몇 광년은 떨어져 있다. 무엇보다 돌아가신 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서 찾아온다는 설정은 제례의 근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가족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제사 문화는 우리를 보고 싶어 하는 어른들이 찾아오시니 대접하고 맞이하자. 의 차원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단계까지 올라간 어르신들을 '조상'으로 모시면서 우리를 굽어살펴 주소서...의 기복 신앙에 가까운 느낌이었지.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그분들이 우리를 보러 오셔/ 우리가 그분들을 모셔. 멕시코 같은 제사라면 나도 환영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텐데, 그럼 그리워서 어떡해. 그분들이 온다고 생각하면 난 신나고 노래하고 싶고 그럴 거 같은데.


코코에서 죽음 못지않은 키워드는 음악이다. 음악은 우리 인생의 동반자이고, 모든 기억의 비밀번호와도 같다. 내가 기억하는지도 몰랐던 스토리들이, 어떤 음악을 듣는 순간 파도처럼 밀려와서 온몸의 신경을 장악하고 관절 마디마디를 후드려패지 않나.. 할머니가 기억하는 음악, 아버지, 손자가 사랑하는 음악. 음악이라는 마법으로 우리는 나비족의 큐가 없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샤헤일루)


(어쩌면 스포일러일지도 몰라요)


특히 이번에는 디즈니 인트로를 멕시칸 스타일로 변주한 편곡으로, 영화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무슨 '멕시카나이즈' 툴이 있어서 거기에다 음악 집어넣으면 다 마리아치 스타일로 바뀌어 나오는 줄....ㅎㅎㅎ https://youtu.be/hVAJ3kR3eVQ


픽사의 센스는 늘 코어에 맞닿아 있다. 업, 월E, 토이스토리.. 인간이라면 국경과 성별과 연령을 초월해 느끼고 있는 본능을 자극한다. 아무도 민망해서 말하지 않는 것을 너무 웃기고 눈물 나게 풀어놓는데 그 와중에 대체로 정치적, 도덕적으로 옳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그랬던 게, 기억해주는 가족이 없는 경우에 그런 식의 말로를 걷는다는 설정은.. 옳지 않았던 것 같다. 기억에서 잊히는 것도 죽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고 일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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