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2 보고 왔다
생애 첫 번째 슈퍼 히어로는 팀 버튼 감독 작품에서 마이클 키튼이 연기한 배트맨(1989)이었다. 당시 코미디 연기를 주로 했던 마이클 키튼에게 배트맨 역을 맡기는 모험을 한 팀 버튼 감독은 마이클 키튼의 눈이 너무 슬퍼서 캐스팅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울하고 진지하고 책임감 강한 슈퍼 부자 히어로를 연기하는 데에 필요한 건 슬픈 눈이었다. 첫 히어로 입문이 그래서인지, 어린 나에게는 슈퍼 히어로가 된다는 건 멋지고 부러운 일이 전혀 아니었다.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능력자들이 자신의 삶과 행복과 사랑을 희생하고, 분열된 또 하나의 자아를 마음의 벗 삼아 살아가는 이야기가 히어로 무비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영웅은 스파이더맨이었다. 샘 레이미 감독과 토비 맥과이어가 만들어 낸 불안하고 외로운 청춘의 혼돈 그 자체인 스파이더맨(2002). 청춘의 우정과 사랑을 저당 잡힌 피터 파커가 슈퍼 히어로가 되는 과정에는 가족의 비극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쭈구리;; 청년. 인생은 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가!!! 눈물짓게 했던 토비 스파이더맨.
그래서 2000년대 중반쯤부터 시작된 히어로 무비의 홍수는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스파이더맨은 깨방정 청소년 캐릭터로 변했고, 고뇌를 좀 하는가 했던 아이언맨은 개그 캐릭터가 되어 가는 중인 것 같다.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저스에서 진지충을 맡고 있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외에는 마음에 남은 캐릭터가 없었다.
그러다 우리 데드풀(웨이드 윌슨)을 만났다. :) 유머와 위트를 집어넣은 캐릭터가 아니라, 유머와 위트를 기본기로 탑재하고 있는 캐릭터. 특수부대 군인 출신으로 사는 의미가 딱히 없어 보이는 웨이드 윌슨은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위악적으로 비꼬거나 가볍게 웃어넘기는 것으로 대응한다. 흥신소 스타일의 막일을 하면서 먹고살지만, 센스 있고 아름다운 여자 친구는 스트리퍼지만, 좀 행복해질까 했더니 암에 걸려 버리지만, 암 치료하려고 실험에 참여했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그러진 (+자체 힐링 능력이 있는 슈퍼 파워) 괴물이 됐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는다. 타고난 위트, 그런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2편에서는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세상을 떠나는 극한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죽고 싶은데 힐링 능력 때문에 죽지도 못한다. 여자 친구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초능력 돌연변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게 지상 과제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처지를 가지고 농담을 한다.
인도계 택시 운전사 도핀더, 맹인 흑인 할머니 알, 레즈비언 돌연변이 네가소닉, 러시아계 강철 인간 콜로서스, 멕시코계 어린이 돌연변이 파이어피스트, 이유는 모르겠으나 운이 엄청 좋은 흑인 여성 히어로 도미노까지 미국 기준으론 소수자라고 할 만한 친구들과 함께 데드풀은 세상을 바꿔 나간다. 딱히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절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죽인 놈들에 복수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지켜주기 위해 악당과 싸우고 소년을 구하는 것뿐이다. 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다 보니 세상이 변해 있고 처단해 마땅한 놈들을 응징하게 된다.
그래서 데드풀은 어쩌면 가장 교훈적인 슈퍼 히어로다. 배울 점이 너무 많다..;;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마음, 아무리 힘들어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유머 감각, 큰 꿈이나 목표가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을 위해 행동하는 철학..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여자 친구 바네사가 눈 뜨고 못 봐 줄 외모가 된 웨이드를 사랑하는 상황이 너무 납득이 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지금 당장 내 옆에 있었으면 하는 히어로. 그래서 데드풀은 특별하다.
데드풀을 alter ego라고 할 정도로 데드풀 그 자체인 라이언 레놀즈 역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멋있고 재미있고 성실하고 솔직한 배우. 한때 세계에서 제일 예쁘다 생각했었던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결혼한 이유를 알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