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늦은 리뷰
1년 반 만에 극장에 갔다. 캄캄한 극장에 앉아 거대한 스크린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는 걸 감안하면, 영화의 울림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웬만했으면 다 좋다고 했을 상황에서도 뭔가 찜찜했으니.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 수상 소식에 정작 영화 얘기는 묻혀 버린 영화 '미나리'를 본 건 시상식 직전이었다. 윤여정 배우 대체 어떻게 하셨길래!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서 연기에도 집중하면서 봤는데, 물론 대단한 연기였지만 늘 그렇게 대단하셨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죽는 게 무섭다는 손자 데이빗을 안고 "우리 손주 누가 데려 가, 아무도 못 데려 가"하는 장면은 한국 드라마에서 이미 십수 번은 본 듯 익숙했다.)
영화의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다. 7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4인 가족이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칸소 시골로 이주해 한국 채소 농사를 지어 보려 한다. 심장이 안 좋은 아들의 치료를 앞세워 캘리포니아로 다시 가고 싶어 하는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남편은 한국의 장모님을 모셔 오자고 제안한다. 미국 시골로 온 어머니는 화투를 치고 미나리를 심으면서 외로운 가족과 한국의 연결 고리 같은 존재가 된다.
문제는 단순한 스토리만큼 단순한 캐릭터들이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남편/아빠 정도를 제외하면 아주 평면적이다. 사실 모든 캐릭터들이 남편/아빠의 고뇌와 입체성을 위해 존재하는 위성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자체로 한국을 상징하고 있는 할머니 캐릭터는 가족의 힘이자 활력소가 되었다가 짐이 되고 마는 모든 한국 할머니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압축해서 만든 인물 같았다. 한예리가 연기한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느껴지지 않는다 아들 때문에 캘리포니아 가고 싶어 한다는 설정에도 정작 아들에 대한 사랑을 느낄 만한 에피소드나 장면은 전혀 없다. 마치 시골에서 농사짓겠다고 도전하는 남편에게 난관을 만들어 주기 위해 옆에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뛰지 마'라는 소리를 수시로 듣고 사는 심장이 안 좋은 아들 정도가 할머니 싫다면서 실은 할머니 좋아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딸은 아예 존재감이 없어서 할 얘기가 없고... 농사일 도와주는 미국인은 기독교 광신도인데 광신도라는 점이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봐서는, 처음 미국 땅에 도착한 한국인 이민자들의 눈에 미국 시골의 독실한 크리스천들이 저렇게 보였나 싶기도 했다.
영화는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몸을 가누기 어려워진 상태에서도 힘든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자 쓰레기를 태워 놓으려다, 일껏 키워서 이제 판로까지 뚫어 놓은 농작물 창고를 다 태워 버리는 장면으로 메시지를 정리한다. 가족이 중요하지 농사가 중요하냐며 캘리포니아 가겠다던 아내는 불구덩이에서 남편의 꿈이자 희망인 농작물 상자를 꺼내고 있고, 농사 성공해서 애들한테 뭔가 하는 모습 보여 주겠다며 캘리포니아 안 갈 거라고 외쳤던 남편은 그런 아내를 구하려 불길에 뛰어든다. 결국은 농사라는 꿈도, 아이의 건강이라는 바람도, 캘리포니아라는 익숙한 삶도 모두 가족을 위한 것... 그리고 '한국인은 머리를 쓴다'며 미국인의 도움/서비스를 거절했던 남편이 돈을 쓰고 미국 서비스를 받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할머니라는 한국과의 연결 고리는 병에 걸리고 사고를 내면서 가족을 미국에도 연결시켜 주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할머니에게 너무 큰 짐을 떠넘기는 것 아닌가,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70년대라고는 하지만 여성, 엄마, 할머니에게 대체 어디까지 바랄 건가요.
하긴 지금도 그러니... 그런 역할을 빼어나게 연기한 70대 여배우의 쿨하고 당당한 수상 소감을 '돈 벌어 오라 잔소리한 아들들에게 감사'라고 오역하는 언론까지 더해지니 영화고 현실이고 전부 보고 있기가 힘이 들었다. 영화와 현실을 뒤섞어서 얘기해 보면, 이 사회(한국이 유독 그런 줄 알았더니 전 세계)는 여성을 남성의 아랫사람, 심하게는 소유물 취급하는 동시에 끝없는 헌신으로 남성을 구원하는 신적인 역할을 강요하는 해괴하면서도 상당히 일관성 있는 태도를 취해 왔다. 문학을 비롯해 영화 등 예술이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에 대한 모순적인 묘사를 얼마나 능란하게 해왔는지는 예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도 어렵다. 분명한 건 엄마, 할머니를 환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적인, 강력한 인물로 묘사하는 작품 치고 여성을 도구나 배경으로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