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지만 약하지 않아. 예쁘지만 인형은 아니야.

범블비 보고 왔다

by 하나김

내가 누구인지 알아 가는 과정이 인생이라면, 사춘기는 인생의 클라이맥스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지, 너는 누구인지, 이 세계는 뭔지 가장 치열하게 알아내려고 애쓰는 시기니까. (결국 못 알아낸다는 걸 알고 포기하지만;)


그래서 사춘기의 친구가 가장 소중한 것 같다.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모두 합하면 그게 진짜 나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친구들 안에 나의 조각들이 조금씩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


<범블비>의 찰리(헤일리 스타인펠드)에겐 범블비가 그런 친구였다. 가족들과 어울리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외톨이 소녀의 열아홉 사춘기에 나타난 세상과의 연결고리.


디셉티콘과의 치열한 전투 중에 목소리를 잃은 범블비는 묵묵히 찰리의 이야기를 듣기만 한다. 눈알을 굴리고 고개를 저으면서 의사 표현을 하기는 하지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정도의 언어는 없다. 공감은 하지만 자기 얘긴 안 하는 사춘기 최적의 친구.


범블비는 자동차 로봇의 형상을 한 강아지 같다. 동그란 눈과 눈꺼풀부터 머리 위 안테나(?) 같은 것까지 너무 강아지다. 아무 말 안 했는데 속상한 거 어떻게 알고 다가와서 따뜻한 몸을 기대는 강아지처럼, 찰리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챈다.

저 표정은 강아지잖아 (뀨)


어쩌면 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조언이 아니라 경청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도, 엄마 남자 친구도, 남동생도, 옆집 친구도 모두 찰리를 사랑하는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모두가 자기 얘기만 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범블비는 "난 이걸 좋아해"라고 자기 얘기를 할 수가 없으니 찰리가 좋아하는 것에 반응을 보이는 것밖에는 못한다. 이건 괜찮고, 이건 별로. 그러다 찰리를 좋아하게 되고 찰리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좋아하는 친구가 된다. 싫다고 카오디오에서 뱉어 버렸던 더 스미스의 곡도 나중엔 좋아하게 되고.


외톨이 소녀가 로봇 친구 만나서 사람 친구도 사귀고 가족의 사랑을 발견하는 이야기는 좀 뻔하긴 하다. 하지만 범블비 만나서 초미녀 여자 친구 사귀고 멋쟁이 되는 트랜스포머 이야기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의미도 있다.


더 스미스부터 듀란듀란, 티어스 포 피어스까지 좋은 음악이 많이 나온다. 조금 아쉬운 건, 80년대라는 배경이 스토리에 녹아 있지는 않다는 거다. 가끔 나오는 냉전 구도 얘기 빼면 왜 이 사건이 80년대에 일어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트랜스포머 프리퀄이니까 앞선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야겠다 한 건가. 어떤 면에선 그냥 요즘 밀레니얼 세대에게 인기 있는 80년대 소품, 인테리어, 음악, 분위기를 양념으로 뿌려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의 진짜 의미는 주인공 찰리 역의 헤일리 스타인펠드다. <비긴 어게인>에서도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도 엄청나게 예쁘고 사랑스럽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 반항적인 눈빛의 소년 같은 매력. 충분히 귀엽지만 연약해 보이지 않고, 진짜 예쁜데 인형 같지는 않다. <리얼리티 바이츠>, <비틀 주스> 시절의 위노나 라이더가 떠오를 정도.


자동차 정비가 취미이고 록 음악을 사랑하는 소녀 역할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가 없다. 헤일리 스타인펠드의 시대가 열릴 것 같다...


헤일리가 부른 영화 주제곡 'Back to Life'도 상당히 좋다.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 나오는데, 영화관 계단에서 탭댄스를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됨.


https://youtu.be/IjyDPKG1B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