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imatrix - World Record가 생각나는 요즘
앞구르기조차 제대로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체육 기능평가 수업 이후, 스포츠를 경멸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못하니까, 머리가 나쁘니까 몸을 쓰려고 하는 거지.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못하는 것.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체육 시간에 비웃음을 당하면 당할수록, 운동은 하지 않고 공부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의 운동 ㄱㅈ가 됨)
류현진 경기를 보려고 미국 서부 여행 중 예정에도 없던 애리조나 피닉스까지 다녀온 지금의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어린 시절이지만, 그땐 그랬다. 조금 더 빨리 스포츠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늘 한다.
스포츠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게 된 계기가 애니메이션 옴니버스 영화 '애니매트릭스'의 단편 '월드레코드'다. 2000년대 초반 전세계인의 뇌구조를 바꿔놓은 매트릭스 시리즈의 워쇼스키 자매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작가들과 함께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든 9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실려 있다. '월드레코드'는 '무사 쥬베이' '뱀파이어헌터 D'의 가와지리 요시아키가 각본을 쓴 작품이다. 100미터 달리기 세계 기록 보유자 댄이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나와 현실 세계를 직면하게 되는 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댄은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의 육상 선수로 살아가고 있다. 상상 속의 세계에서도 그는 달리고 있다. 타고난 신체 능력과 감각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그는 눈으로 보거나, 머리로 이해하지 않았는데도 이게 가짜 세계란 걸 알아챈다. 몸과 감각으로 철학적 깨달음을 얻고 세계를 이해하는 댄의 모습은 살아움직이는 듯한 근육과 땀방울로 묘사된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로고가 귀여운 잠바 파는 팀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운동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부끄럽습니다ㅠㅠ) 댄이 몸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 누구보다 격렬하게 가짜 세계에 저항하는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왜 운동을 하는가. 나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왜 공부를 하는가. 역시 나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공부하는 게 무슨 벼슬이냐?
나는 왜 존재하는지, 왜 살고 있는지,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선수들은 가장 치열하게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고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신체의 능력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중력과 싸우면서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한계는 없다. 세계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부조리를 자각하고 투쟁하는 인간. 지금 얼음판에서 근육과 호흡기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한계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저 선수들이야말로 까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부조리한 영웅 그 자체다. 신체 능력의 한계와 세계의 제약을 자각하면서도 끝까지 싸우고 이겨내는 인간의 모습에 감동한다.
까뮈의 '시지프 신화' 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결론: 그렇게 해서 나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즈음부터 올림픽 덕후가 되었다... 모든 스포츠 선수들은 뛰어난 철학자이자 두려움 없는 투사다. 이승훈 이상화 화이팅!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