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를 마주하는 일

변산 보고 왔다

by 하나김

쏟아붓고 있는데 안 될 때가 있다. 딱 한 고비만 넘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안 될 때가 있다. 파울로 코엘료는 한 번만 더 곡괭이질을 하면 황금이 나온다고 했다지만, 그게 언제냐고.


영화 <변산>의 주인공인 무명 래퍼 학수(a.k.a. 심뻑)가 그렇다. 쇼미더머니에 6번째 출전해서 본선에는 올랐지만 정작 그 이후의 고비를 넘지 못한다. 편의점 알바, 발렛파킹 알바를 해가며, 좁은 고시원에서 시끄럽다 욕먹어 가며 랩만 하는데도, 홍대에서는 나름 유명한 래퍼인데도, 그게 안 된다.



답답한 학수의 앞에 나타난 건 잊고 싶었던 고향 변산이다. 연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간 고향에선 오랫동안 학수를 짝사랑해 온 선미와 렉카차 사업을 하는 친구들, 깡패가 된 왕년의 쭈구리 친구가 있다. 청순한 미녀인 줄만 알았는데 양다리, 삼다리 걸치는 여자 친구도 있다.


수시로 감방을 드나들고, 어머니 빈소에도 오지 않는, 미워하고 또 미워했던 아버지는 힘도 없고 깡도 없이 찌그러져서는 틈만 나면 "미안하다"는 얘길 해서 죄책감 느끼게 만든다. 학수는 뭘 잘했다고 날 불러서 괴롭히냐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 외에 아버지와 대화하는 방법을 모른다. 거기에 되는 일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자기 신세까지 겹치니 아버지에게 욕하는 것쯤은 대수롭지도 않다.


선미는 학수의 순수한 모습을 되찾아 주기 위해 애쓴다. 아름다운 시를 쓰고, 버스에서 꽃다발을 내밀며 고백하던, 어머니 산소 앞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던 학수의 마음을 기억하고 있다. 선미와 함께, 학수는 스스로의 마음을 직면해 나가기 시작한다. 솔직히, 학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솔직히, 미경이를 좋아했던 건 그냥 예뻐서였다. 꼴도 보기 싫었다던 고향에 언제나 돌아오고 싶었고, 촌스럽고 무식한 시골 동네 친구들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하다.


학수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건 진짜 자기를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인지, 누구를, 무엇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부끄럽고 민망해서, 혹은 강해 보이고 싶어서 가장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니 마음속 깊은 얘기를 담은 랩을 '절지' 않고 할 수 있었다.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면 세상의 공기를 느낄 수 없다. 내가 모르는 것, 부족한 것,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깨달아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나를 모르는데 백날 노력하고 애써 봤자, 예의 그 고비는 절대 넘지 못한다.


박정민, 김고은 두 배우의 연기는 대단했다. 향후 20년 간 한국 영화를 이끌어 갈 배우들이라고 확신했다. 박정민 배우는 힙합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랩 실력이 대다나다... 직업 래퍼가 만든 삽입곡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극 초반의 서울말을 점차 전라도 사투리로 바꿔 나가는 묘기까지 선보인다. 김고은 배우는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사랑스러움과 천연덕스런 연기가 놀라웠다. 노래는 왜 또 이렇게 잘하는 거냐고.


박 배우의 랩/ 김고은 배우의 노래 감상

https://youtu.be/P_rO1EHbFU4


장항선 아저씨 연기는..... 그냥 예술이다. 아들에게 미안해 죽겠고 자기 자신에게는 화가 나서 죽겠고, 그러면서도 아들한테 서운하고, 이렇게 끝나는 내 인생이 너무 허망하고.. 그걸 표정만으로 보여 주신다. 우리 아버지 약간 닮으셔서 그런가?.. 아빠 생각나고 눈물도 초큼 났다.

(변산 스틸컷 가운데 장항선 아저씨 나온 게 없네. 이것부터가 크게 잘못됐어!!)


그건 그렇고, 영화 자체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양념 캐릭터들이 스토리에 녹아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많았다. 친구들과의 관계, 선미와 학수가 감정을 쌓아 나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랩을 배치하는 방식도 좀 더 섬세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원스>에서 대사 대신 노래로 감정을 표현했던 것처럼 할 수도 있었을 것 같고. 발리우드 영화 같았던 엔딩씬은 정말 좀 과했다 싶다. 배우들의 재능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너무 한꺼번에 다 쏟아 내니까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