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이즈 본 보고 왔다
정말 좋은 공연에서는 눈을 감게 된다. 대학 시절, 린킨파크 내한 공연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린킨파크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좋아하는 팀은 아니다. 그때도 그냥 당대 최고의 인기 밴드가 온다고 하니까 보러 갔다. (서울에 올라올 때, 내 목표 중 하나는 세계적인 뮤지션의 공연은 호오를 떠나, 밥을 굶어서라도 무조건 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Faint 연주할 때였던 것 같은데, 어떤 에너지가 갑자기 너무 크게 느껴졌다. 아무런 맥락 없이, 이유 없이, 이 공연은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고, 눈을 감고 폴짝 뛰었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세계적인 록스타가 내 눈앞에 있는데 눈을 감게 만드는 에너지. 물리적으로 몇백 미터나 떨어진 무대 위의 연주자/가수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영화관에서 경험했다. 의자에 묶인 채로 복사된 디지털 영상 보고 듣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스타 이즈 본>의 주인공 잭슨 메인(브래들리 쿠퍼)이 '블랙 아이즈' 전주를 연주하는 순간부터였다. 까만 화면에 빛이 들어오고 조금씩 커지는 기타 소리에 올라가는 입꼬리, 리듬 타는 손발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잭슨의 모습이 드디어 보이고 노래를 시작했을 때에는 온몸이 녹는 줄.; 스크린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그 진부한 표현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스타 이즈 본>은 여러 번 리메이크된 클래식이다. 불우한 성장 과정, 점점 나빠져 가는 청력으로 지친 당대 최고의 컨트리 록 스타 잭슨은 술과 약에 기대서 매일을 산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 우연히 드랙바에서 만난 가수 지망생 앨리(레이디 가가)는 잭슨에게 음악의 아름다움과 힘, 에너지를 다시 깨닫게 해 준다. (당연히)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 잭슨의 도움으로 앨리는 스타가 되고, 그 사이 잭슨은 무너져 간다.
음악이 유일한 언어인 잭슨에게 듣지 못하고 노래하지 못하는 미래는 죽음과도 같다. 사실상 죽어가고 있는 잭슨에게는 자신의 언어를 이해하는 앨리와 처음 만난 순간, 그리고 무대에서 처음 함께 공연했던 그 순간만이 행복이었다. 이 영화에서 누가 누구를 구원하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래서, 이 영화는 아름답다. 순간의 힘, 순간의 행복을 완벽하게 캡처해 낸다. 실제로 2017년 4월 열린 코첼라에서 공연한 것을 원 테이크로 촬영한 영상은 공연의 에너지를 사로잡아 집어넣은 것 같다. 놀라운 건, 공연 영상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열광하는 관객의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을 바라보는 뮤지션의 시점, 서로를 바라보는 연주자와 가수의 시선, 무대를 준비하는 백스테이지의 시선뿐이다.
공연을 볼 때마다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뮤지션은 지금 얼마나 행복할까? 이 무대가 끝나고 나면 얼마나 허무할까? 지금 이 순간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런 상상을 현실로 보여 주는 공연 영상들.
한 번도 맞춰 보지 않은 'Shallow'를 즉석에서 공연하는 잭슨과 앨리가 조금씩 서로의 리듬, 에너지를 읽어 내면서 다가가고 맞춰 가고 하나가 되는 장면은 음악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명장면이었다.
술과 약에 찌들어서 부정확한 발음에 감지도 않은 머리로 뒷골목에 쓰러지면서도 언제나 그림 같은 톱스타여야 하는 잭슨은 앨리 앞에서만 연약하고 섬세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다. 전용기(;;)를 태워 공연장으로 데려 온 앨리를 관객에게 소개할 때는 f워드를 쓰면서 무대 위의 쿨한 스타를 연기하다가, 백스테이지에서 앨리를 보고 첫인사로 고작 “How are you?”를 건네는 장면이 기억난다. 앨리를 무대로 끌어내면서 수줍고 따뜻하고 강단 있게 속삭인 말 “All you gotta do is trust me.”는 환청처럼 계속해서 귓가에 울린다. ㅠㅠ
브래들리 쿠퍼에 대해서는 대체 뭐라고 이야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기술적으로 예술적으로 완벽한 연기와 연주, 노래, 연출이었다. 평소에 브래들리 쿠퍼가 얼마나 전형적인 백인 미남상이고 정확한 발음의 동부 억양을 쓰는지 생각해 보면, 잭슨의 완전히 뭉개진 발음에 남서부 악센트, 지저분한 외모가 경이로울 지경이다. 직접 연주한 기타 사운드가 깔린 영화 음악을 듣고 있다가, 작곡까지 브래들리 쿠퍼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대체 이 사람은 가수 활동을 왜 안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분노하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 ♡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는 아주 제대로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슬픔 속에 끝나는가 했던 영화의 말미는 'DIRECTOR BRADLEY COOPER'라는 아주 대문짝만 한 자막이 장식한다. 당연히 브래들리 쿠퍼가 연출한 걸 알고 봤는데도, 막상 저 이름이 뜨면 진짜.. 숨이 턱 막힌다. 대체 뭐야!!!! 이 초천재 지니어스 할리우드 재능인!!;;
레이디 가가는 잘한다.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생각보다는 괜찮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레이디 가가의 가창력과 감각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이미 수년 전에 전 세계에서 인증받았다. 결국 이 영화에서 레이디 가가가 보여 주는 건 '메이크업 벗긴 가가' 뿐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매력이 없고 무미건조하다. 음악 잘하는 기계 같다. 쇠고기 드레스 입고 자웅동체설 주장하면서 얼굴에 뿔 붙이고 다닐 때가 차라리 나았다 싶다.
브래들리 쿠퍼는 모든 곡에서 가가를 받쳐주기 위해 목소리의 크기와 톤을 조절하는데, 가가는 아주 목청이 터져라 '외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ME ME ME. 그런 사람인 줄 알았고, 그럴 것 같았는데, 역시 그랬다.
서론이 길었다. 본론은 다음과 같다. 이제 브래들리 쿠퍼는 알 파치노 다음 가는 최고의 배우다. 이제 브래들리 쿠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뒤를 이을 최고의 배우/감독이다. 이제 브래들리 쿠퍼는 크리스 스테이플튼 다음으로 많이 들은 컨트리곡의 가수다. 이제 브래들리 쿠퍼는 존 카니보다 더 좋아하는 음악 영화감독이다. 브래들리 쿠퍼는.........
할리우드 놈들 때문에 못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