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차리고 추억해 보는 H.O.T.
Q. 스트레스 받을 때는 어떻게 해요?
A. 참아요.
1990년대에는 연예 잡지가 무지 많았다. 주니어부터 시작해서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잠깐 생겼다 없어진 것들까지. 에쵸티(영어로 타이핑하기 힘들어서 이하 에쵸티)는 당대 최최최고고고의 스타였으니 잡지 한 권 전체가 에쵸티로 도배가 되곤 했었다. 그런 잡지에는 왜 때문인지 꼭 10문 10답이 있었다.
타이틀은 기억 안 나는 하이틴 연예 잡지에 장우혁의 저 문답이 있었다. 스트레스 받으면 어쩌냐는데 참는다니. 그것도 고등학교3학년 소년이 할 소립니까요; 아마도 저걸 보고 반했던 것 같다. 스트레스 받으면 운동하거나 음악듣거나 춤추거나 그런다는 활동성과 귀여움을 강조하는 대답들 속에서 홀로 도도하게 빛나는 “참아요.”. 패기 없음을 선택하는 그 패기가 너무 멋졌다. 약간 음울해 보이는 미소년의 역사에 획을 그은 인터뷰. 스트레스 받으면 참는다는 잘 생긴 사람이라서 좋았다.
얼마전에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고 수많은 언니동생친구들과 더불어 나 역시 눈물을...(흘리지는 않았고 머금은 정도?) 공연하는 걸 보고 운 게 아니라 90년대 자료 화면에서 교복입은 아이들 모습이 나온 걸 보고. 너무 귀엽고 예뻐서 울었다. 우리집 강아지가 엄마 좇아다니듯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예를 들면 그냥 스트레스 받으면 참는다는 말이 멋있어서, 뭘 해도 좋고 뭘 입어도 예뻐 보여서 울고 있는 아이들. 순수하다기 보다는 무식하고 바보같이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 무엇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좋아지지가 않아서 서글프다.
대학 때는 학교에서 열린 수요예술무대 공연 보러 갔다가 엘보우 돌파 신공을 펼쳐 브라이언 맥나잇 발냄새까지 맡고 왔었는데. 이제는 스탠딩 공연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하는 게 익숙하다.
우리집에선 내가 에쵸티 따라다니던 시절이 흑역사로 기록되어 있어서 나 놀릴 때 장우혁...만 얘기하는 것으로 게임 끝나고 그랬었다. 괴성지르면서 귀막고 그만해 외치고.
대학 땐 허세 떠는 데 지장 있을 것 같아 클럽에쵸티였음을 숨기고, 신문사 첫 부서 문화부에서는 전문성을 부각시키고자(뭔 상관인데) 쉬쉬하고.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누군가가 있었던 것뿐인데! 나의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또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네. 나는 초큼 늙고 오빠들도 초큼 마니 늙고.
다시 보니까 또 다시 좋아지고 생각나고. 맞아요. 변한 것은 시간뿐. 팬이 된다는 것은 편이라는 것. 하여간 뭐든지 하려면은 무엇보다 만수무강하소서..
추신. 언니동생 여러분, 죄송하지만 에쵸티는 저희 세대입니다. 82년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