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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 Dec 27. 2023

자성(自性)하는 지방과학기술 문화를 위해

과기정통부에서 올해 2월에 발표한 『제6차 지방과학기술진흥 종합계획수립 연구』의 최종보고서를 보면 ‘과학기술 혁신을 기반으로 지역주도의 균형발전시대 개막’ 이라는 비전과 함께, 자생력 높은 지역혁신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지역 혁신을 뒷받침하는 민간 주도의 생태계 활 성화’라는 추진전략이다. 연구진들은 이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간적으 로는 우수 지역 혁신 클러스터를 육성하고, 혁신촉진제도와 인프라를 고도화하며, 문화적으로 지역의 과학기술 및 디지털 교육문화 저변을 확대한다는 세부 전략을 제시하였다.

이상의 전략을 구현하는 세부 과제로 디지털 접근성을 고양하고 과학문화 인프라 를 확충한다는 계획은 세대 간, 수도-지방간 디지털 격차가 심한 한국적 상황에서 매우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혁신 클러스터의 요소투입방식과 구성 형태에 집착하면서 클러스터 성공의 가장 중요한 열쇠인 잉여(spillover)지식 관리와 구성 주체간 응집성(하이퍼 클러스터)을 간과하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부분은 지역 문제 를 과학기술과 연결하여 스스로 해결하는 자성적(自性, self-organizing) 과학문화에 대한 추진 과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다.


수요자 중심의 지방 혁신 클러스터 : 시민 중심의 혁신 지원, 유럽의 리빙랩

과학기술 기반의 지방혁신생태계를 위해 혁신 클러스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에 산업계, 학계, 그리고 정 부에서는 이견이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199)는 혁신 클러스터를 기존 산업집적지에 혁신 주체를 포 함한 형태로 개념을 설정하고 있다. 즉 혁신 클러스터는 생산 벨류체인에 치우친 기존 산업클러스터 공간 에 대학, 공공연구기관, 컨설팅회사, 지식서비스회사, 중개인 등 지식을 취급하는 조직을 집적하여 네트 워크로 연결한 개념이다. 혁신 클러스터는 매우 동적인 상태 그 자체이다. 한국도 그동안 지역발전의 한 방편으로 다양한 혁신 클러스터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더 커졌으 며, 추진 성과는 답보상태에 있다. 특히, 지식을 창출하는 네트워크 구축은 구색 맞추기 사업으로 취급 받 기도 한다. 같은 지방이라고 해도, 부처별로 분절된 지원체계로 인해 지역의 자원도 분산배치 될 수 밖에 없다. 올해만 해도 그렇다. 국토부의 도심융합특구, 과기정통부의 디지털 혁신거점조성, 산업부의 기회발 전특구는 모두 혁신 클러스터 성격을 지향하는 다양한 사업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지방의 자원과 분산 추진되어 효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혁신 클러스터의 개념 (과학기술부, 2005)


혁신 클러스터도 새로운 개념적 발전이 필요하다. 2010년 전후로 유럽 국가들, 특히 북유럽을 중심으로 혁신 클러스터 구성에 관한 새로운 모델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동안 혁신 클러스터는 특정 공간을 중심 으로 이루어지는 기업, 대학, 정부의 혁신창출 네트워킹에 따른(엔트로피 증가활동), 소위 ‘트리플 헬릭스(Triple Helix)’가 강조되었지만, 여전히 공급자 중심의 혁신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 이 혁신의 최종 수용자(소비자, 당사자, 시민)를 포함하는 ‘쿼드러플 헬릭스(Quadruple Helix)’ 혹은 ‘멀티플 헬릭스 (Multiple Helix)’라는 새로운 방법론이며, 그 구체적인 형태가 '생활 속 실험실'이라 불리는 리빙랩(livinglab)이다. 유럽연합의회EC는 Horizon 2020 펀드를 통해 2005년부터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공동 작업(co-creation)하여 혁신의 효능감을 높이는 리빙랩 활동을 지원해왔고, 2006년에 지원받은 19개의 리빙 랩은 협의체를 결성하였다. 현재 가입 멤버가 490개까지 확대한 이 협의체가 바로 유럽리빙랩 네트워크(ENoLL)이다.


지방에 필요한 건, 바보야, 문제는 도시지능이야!

창의적인 지방과학문화 형성을 위해 지방이라는 공간에서는 지식을 ‘잉여(spillover)’하는 다양한 장치가 필 요하다. 혁신은 지식을 먹고 자란다. 앞서 설명한 혁신 클러스터 역시 전후방 연계 산업을 중심으로 대학 과 연구소 같은 지식생산조직과 기업협회 및 지원기관 같은 지식연계조직이 집적화되어 지식을 창출하 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이러한 공간적 개념에 ‘시민 집단 지성’을 포함하는 ‘도시지능’이 중요해졌 다. 높은 지능을 가진 도시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베를린은 2020년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 하면서 정책의 방향을 기술이 아닌 ‘시민참여를 통한 도시지능 증대’로 전환했다. 도시는 온라인플랫폼 을 구축하고 일반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모든 도시 프로젝트에 의견을 내고 공유하며 상호 학습하는 공간 으로 재구성하였다. 성균관대 오민정 교수(2023)에 의하면 ‘지능적이고 인도적인 디지털화를 통한 살기 좋은 스마트 도시’라는 베를린 스마트시티 모토는 창의적이고, 개방적이며, 참여적인 도시지능을 추구한 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도시는 <함께하는 디지털: 베를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시민 참여 기 반의 도시지능을 높여 도시 디지털화를 실현해나가고 있다. 시민 공동의 이익과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베 를린은 집단지성과 지적 자산의 힘을 높여 모두가 협력적으로 작업하도록 지원한다. 핵심 요소는 다양한 사람의 참여와 협력으로 도시 지식을 축적하고 공유하는 과정이다.

함께하는 베를린 스마트시티 (Belin Citylab)


무형의 지능을 키우는 도시의 핵심 거점 공간

도시지능을 높이는 또 다른 사례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를 들 수 있다. 핀란드는 1928년 모든 시민들의 차별없는 공공도서관 무상 이용을 법으로 제정한 바 있다. 이는 현재까지 발전되어 온 핀란드 시민의 필 수적인 권리다. 헬싱키는 핀란드의 독립 101주년을 기념하여 시내의 문화 중심지에 헬싱키 중앙 도서관 ‘우디(Oodi)’를 지었다. 우디는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다. 우디 중앙 도서관 홈페이지의 첫 페이지는 우디가 도시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는 곳임을 설명한다. 우디는 전통적인 도서관의 역할인 책을 빌려주는 공공 도서관 기능을 뛰어넘어 도시의 지식을 공유하고 유통하는 핵심 거점 역할을 수행한다. 사용자에게 지식 과 새로운 기술 그리고 이야기를 제공하고 있으며, 시민이 배움을 위해 접근하기 쉬운 장소에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공간을 제공한다. 전시와 공공 강연 및 영화관, 레스토랑, 카페 기본 인프라 시설뿐만 아니라, 토론을 위한 가변적인 회의실, 어린이를 위한 놀이 시설, 재봉틀부터 3D프린트까지 다 양한 창작장비, 예약만 하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실험 공간, 워크숍 공간과 열린 대화를 할 수 있는 아 고라까지 풍부한 공간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녹음하거나 영상 편집을 위한을 고가의 장비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크고 작은 공간에서 시민들은 리빙랩 실험을 수시로 진행하며 도시 구성원들의 지식 창 출과 지식공유를 돕는다. 자기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시민들의 워크숍이나 작은 전시들이 날마다 진행되 고 있다. 헬싱키는 온-오프의 지식공유 채널을 통해 지식을 마치 공기처럼 공중에 부유시키며 도시 지능 을 높이고 있다.

헬싱키 Oodi 도서관 홈페이지

지역과 과학기술을 연결하는 시민들

이상의 사례들은 지방혁신 클러스터나 지방과학문화 구현에 있어 지방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에 관한 시사점을 준다. 창의를 기반으로 혁신을 만드는 지방 과학문화 정착을 위해 규제자유특구 지정, 메뉴판 같은 다양한 지원프로그램, 하드웨어 인프라 구축 같은 요소투입도 필요하지만, 이해관계자의 집단적인 지식 창출과 유입, 지식 잉여를 만드는 개방적 환경 구축이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지방과학문화 정착 을 위해 최종사용자를 포함한 질적 네트워크, 학습을 통한 암묵지의 활발한 잉여, 지방의 관습, 문화, 특 성 등을 고려한 물적 기반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 지역 문제와 과학기술 간 연결을 자연 스럽게 이어주는 전문 과학기술 코디네이터 조직이나 시민 과학자를 양성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오늘날 디지털 전환의 속도만큼이나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과학문화 역량에 있어서 도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는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 이런 다급한 현실에서 자성적인 지방 과학문화 의 올바른 정착을 위한 근본적 변화 방안에 대한 고민되었으면 한다.

[참고]

▸김희대·유상진·김갑식 (2003), 효과적인 지역IT 클러스터의 구축방안에 관한 연구, 경영정보학회

▸오민정(2023), 심포이에시스적 스마트시티 창조를 위한 도시 디자인,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2023), 2022년 과학기술혁신정책지원사업 최종보고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OECD (1999), Boosting Innovation. The Cluster Approach, OECD Proceedings, Paris.

▸헬싱키 우디도서관 https://oodihelsinki.f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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