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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볼 브리야 May 30. 2021

5월 끝자락, 멕시코에서 한국인으로 살기

파도에 마주 서려다 쓸려가기 직전에 쓰는 글

멕시코는 한국인에게 관대한 나라다. 분명 외국인으로서 살기 어려운 나라는 아니다. 가끔 눈을 찢어 보이면서 치니또한 네 눈을 가진 아이면 얼마나 이쁠까(한 문장으로 이렇게 많은 감정 불러일으킬 수 있나?) 말을 할 때 웃어넘기는 일이 발생하지만, 그들에게 악의는 없다. 동양인의 눈을 비하하는 저 행동은 멕시코 사람들에게 나쁜  의미라기보다는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정말 명확한 혐오를 지닌 행동은 티가 난다. 얼마 전 칸쿤에 다녀왔을 때,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한 중년 여성은 내가 지나가자 갑자기 윗옷을 자기 코까지 추켜세우더니 숨을 참는 시늉을 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도 않던 그 여성은 동양인이 길가에 나타나자 몹시 불쾌하다는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맞다, 도처에 코로나로 인한 동양인 혐오 범죄가 끊이지 않는데 멕시코에서는 그것도 못 느끼고 있었네. 살면서 다신 안 볼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아주 쉽게 마음의 생채기를 냈고, 나는 간간이 그 순간을 곱씹는다.


주말이 다시 돌아왔고 이번엔 오전을 느긋이 보내다가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아직 차가 없으니 우버를 이용한다. 이번엔 조금 젊은 운전기사였다. 창문을 내리고 조용히 길을 가려는데 운전기사가 한국인인지 물었다. 한국사람이라고 답하자, 매번 돌아오는 질문인 남한? 북한? 이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거였다. 그 사람은 한국 대기업 협력사의 직원이었다. 과거형이다. 5개월 전에 잘렸으니까.


한국인과 부대끼며 일해봤으니, 높은 확률로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남한 사람인 것을 알고, 한국 특유의 회사 문화도 겪어봤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사를 성씨로 기억했다. 세뇨르 조는, 그의 말문을 여는 한국인 상사 이야기는 듣는 내내 나를 매우 부끄럽게 만들었다. 2021년 1월에 그를 자른 상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암에 걸려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상사는 멍청한 멕시코인이란 말을 서슴지 않게 사용했으며, 노골적으로 그를 자르려는 듯 회의 시간에 다른 자료를 배포하고 그 자료를 그대로 이행해 스크랩을 발생시키자, 회사에 손해만 끼치는 존재라고 몰아갔다.


상사와의 갈등이 커진 계기는 양심 문제였다. 적정 기준을 달성하지 못한 제품을 납품하는 행위가 사건의 발단이었다. 게으르고 멍청한 멕시코인은 변명만 할 줄 안다며 소리를 질렀고, 질려버린 그는 품질 상관없이 하자가 있는 상품도 양품으로 처리했다. 그러자 상사는 진작할 수 있으면서 말만 늘어놓았다고 또 소리를 질렀다.


지난해 3월부터 시작한 팬데믹을 잘 보내놓고도 회사는 2021년에 들어서자 노동자를 대거 해고했다. 멕시코는 회사가 노동자를 해고할 시 3개월치의 월급을 일시로 지급하는데, 그것조차 제대로 받고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한 달 치 월급을 겨우 받고 나오면서도 지난한 노사 소송이 두려워 회사가 내미는 서류에 사인하고 제 발로 나왔다.


그는 또 다른 상사도 기억했다. 강 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은, 메르세데스 벤츠 검은색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강 씨는 자신의 부서에 있던 파올라라는 여성을 성폭행했다.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도 매번 동일한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성폭행 당한 멕시칸 여성은 해고당했고, 세뇨르 강 씨는 회사에 잘 다닌단다. 부끄러웠다.


회사는 무슨 말을 하며 그 사건을 처리했을까. 아마도 얘가 원래 그럴 사람이 아닌데, 여자애가 한국인 돈 많은 걸 알고 유혹을 했겠지라는 논리로 성범죄를 당한 그 여자를 해고했을까.


그래서 요즘 생각이 조금 많다. 임금이 저렴하면 사람의 가치도 같이 낮아지는 것처럼 행동하는 한국 회사를 보며 동화될까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멕시칸 동료들을 보며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일면서도, 함부로 대하는 일부 한국인 상사들을 보며 괴리감에 빠진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일면 얼마간은 그들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럽고, 그들의 인식 수준이 창피해서다. 팬데믹 2년 차, 당장 내 눈앞의 미래가 걱정되면서도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할 지 헷갈리는 나날이 이어진다. 사실은 마음이 한없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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