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볼 브리야 Apr 30. 2020

멕시코에 남기로 결정한 날

오수가 그 말을 해서 다행이었다. 오수는 취하면 담배를 들고 발코니 쪽으로 간다. 연기를 한껏 품고 내쉬다가 할말이 생각나면 다시 거실로 와서 우리를 보며 말하곤 했다. 그날은 마이떼가 그녀의 감정을 돋우었다. 마이떼, 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너는 피아노도 치고 내가 아는 거의 모든 노래를 가사까지 완벽하게 외우잖아. 상냥하고 명랑한 너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야. 가끔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나면 너 자신을 잃을 수도 있어. 그게 네가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였던 거고. 하지만 다시 돌아가면 돼. 예전 네 모습을 기억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으니까.

오수는 그리고 나를 봤다. 그래, 내게 두 명의 자식이 있다고 가정하면, 지는 그래 한번 해봐. 이런 느낌이야.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보자. 왜냐면 지는 좀 더 단단한 느낌이야. 그래서 나는 지도 정말 사랑하지만, 마이떼 나는 항상 네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말해주고 싶었어.  

마이떼는 23살, 나는 26살, 이 모든 말을 우리에게 해준 오수는 35살이다. 네스퀵을 좋아하고 초코 시리얼도 선반 가득 채워놓는 마이떼를 보며 오수는 어린아이랑 같이 사는 기분이라고 종종 말했었다. 그렇게 명랑한 아이가 전 남자친구와의 일로 가끔 풀이 죽어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수에게도 내게도 마음 쓰이는 일이었다.

오수는 마이떼에게 말을 하면서 곁다리로 나를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그래, 한 번 해봐.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지금 내게 필요한 말이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멕시코로 건너 왔지만 결국 한 달 만에 제자리다. 머나먼 타국에서 백수 1일차가 된 날, 조간 회의에서 암로 대통령은 재난 3단계를 선포했다.

필수 업종을 제외한 모든 산업 군이 일시적 셧다운에 들어가면서 덩달아 내 미래도 불안정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구하기 어려운 한국행 비행기 표가 내 손안에 들어오면서 마음이 더 날뛰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전염병 위협도 있는 상황에서 여기에서 생을 이어나가는 게 맞는 걸까, 그래도 나는 아직 멕시코에 남고 싶은데. 한 달은 너무 짧고 멕시코를 알기에도, 낯선 곳에서 생경한 경험을 하기에도 짧은 시간이다.

여기 남는 결정이 내 고집이란 생각이 드니까 괴로웠다. 이런저런 생각에 어지럽던 머리는 토요일 아침 장을 보고 오는 길에 개운해졌다.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독립적인 요인이 여기엔 있다. 다양하고 신선한 식재료로 삼시 세끼 즐겁게 요리하며 나를 먹여 살리는 일. 오롯이 스페인어와 나의 안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지금. 이래도 되는지 반문하기보다는 좀 더 행복한 데 집중할 수 있는 지금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