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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볼 브리야 May 02. 2020

어느덧 사월 끝자락, 권태로운 시간들

우기에 접어든 멕시코는 저녁이면 자주 비가 내린다. 어떤 날은 우박이 나뭇가지를 다 부러뜨릴 것처럼 거세게 내리다가도 어느 날은 비가 창문을 가볍게 건드릴 만큼만 온다. 그래서 아침저녁이면 꽤 쌀쌀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회색 가디건을 껴입고 부엌에 간다. 망고 두 개를 꺼내와 아침으로 먹고 한껏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거실 바로 옆방에 사는 마이떼는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조심조심 소리 안 내고 걷는 사람은 지고, 쿵쿵 바닥이 울리면 오수란다. 지어진 지 80년 정도 됐다는 이 건물은 아무리 조심해서 걸어도 삐걱삐걱 마루 밟는 소리가 난다.

정신이 서서히 들면 침대 옆에 담요를 펼쳐 두고 요가를 한다. 요가는 첫 직장 다닐 때 배웠다. 당시 바라던 이상향과 실제 직장에서 내놓는 결과물의 괴리가 커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다. 일하면서 생긴 응어리가 집까지 끈덕지게 들러붙는다는 생각에 운동을 시작했다.

가벼운 스트레칭일 거란 생각과는 달리 온몸이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강도 높은 동작이 이어졌다. 한시간 가량의 수업을 마치고 나면 내 몸 구석구석을 정성들여 다듬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일 년을 배우고 나니 어깨가 펴지면서 몸 전체에 힘이 고르게 들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멕시코에서는 운동을 못했더니 서서히 어깨가 솟아오르면서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래도 몇 가지 요가 동작을 하니 다시 예전대로 돌아왔다. 그걸 보면 몸은 예전 일을 다 기억하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그리고 운동하면서 마주하는 바깥 풍경이 색다르다. 누워서 하늘을 보면 울창한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오니까.

코로나 때문에 안팎으로 위기감은 커졌지만 사실 집 안에서의 시간은 조용히 흐른다. 아침에는 거실이 더 햇볕이 잘 드니까 그곳에서 책을 읽다가 정오 지나서는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6시 이전에 저녁밥을 해먹고 오수는 8시, 스페인 사람인 마이떼는 10시에 먹는다. 저녁 8시에는 마이떼와 유튜브를 참고해 운동한다. 그날 기분에 따라 집중 운동하는 부위는 다르다.

어쩌다 우리 셋이 모두 거실에 모이면 티비로 넷플릭스를 본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는 공포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로맨스물을 선호한다. 어디 못 나가니까. 사실 목요일에는 우버를 타고 잠깐 나갔다 왔다. 택시 타고 돌아오는 길에 꽃집을 발견해서 목적지보다 일찍 내렸다. 보라색 셔츠를 입은 주인아저씨가 분홍색 꽃과 하얀 꽃망울을 섞어 색이 진한 꽃다발을 만들어 주셨다.  꽃을 다루는 사람들은 웃음이 환하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위로 하얀 끈까지 느슨하게 묶는다. 낭만을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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