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와인 오프너였다. 우리 집에 마이떼가 온 날 오수랑 나는 마음먹고 편의점에서 가장 큰 코로나를 샀다. 아무리 얘기를 하며 천천히 마셨다해도 그날 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맥주는 배만 부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구나 생각이 들 때 즈음에 두 번째 주말이 돌아왔다. 살짝 취하고 싶은 마음에 들뜬 마음으로 와인을 구매했다.
금요일 저녁, 각자의 일을 마친 뒤 자연스레 모인 거실에서 이야기가 무르익었다. 이제 술을 꺼낼 타이밍인데 코르크 따개가 없었다. 옥상에 오르내리며 몇 번 눈인사했던 윗집이 생각났다. 지금 살고있는 건물 구조는 ㅁ자로 가운데가 정원이다. 계단은 각자의 주방과 발코니로 이어진다.
이런 생각을 눈치챈 듯 오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윗집은 있을지도 몰라. 한 번 가서 물어볼래? 혹시나 실례가 아닐까 걱정했던 마음이 오수의 제안에 다시 용기로 차올랐다. 와인병을 들고 둥그런 철제 계단을 올랐다. 마침 윗집은 요리 중이었다. 살짝 문을 두드리고 인사를 건넨 뒤 와인 오프너를 빌릴 수 있을지 물었다.
짧게 머리를 자른 부인은 흔쾌히 빌려주겠다며 그의 남편을 불렀다. 그의 남편인 마우로는 나를 보자마자 리디아에게 몇 번 들었다며 어디 나라 사람인지 너무 궁금했다고 물었다. 리디아와는 현관이나 옥상에서 자주 마주쳤다. 가끔 철제 계단을 오르다 주방에 있는 리디아와 눈이 마주치면 짧은 인사를 주고 받았다. 좋은 아침, 좋은 오후, 좋은 저녁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답하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만날 때마다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면서도 쾌활한 웃음이 왠지 한국인 같았단다. 예의 바르면서도 활발한 이미지가 당신이 갖고 있는 한국인 이미지라니. 기분이 좋았다.
마우로가 잠시 들어오라며 길을 만들어주었다. 거실에는 큰 발레 공연 포스터와 여러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리디아는 발레리나, 마우로는 화가였다. 거실을 곧장 가로질러 그들의 작업실로 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가득 들어오는 가운데 리디아와 마우로가 환영한다며 샴페인 한 병을 새로 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마우로가 최근 작업한 작품을 보여줬다. 작은 사물, 어느 특정 공간 등을 세밀하게 다룬 영상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집에 있습니다’가 말미를 장식했다.
그 영상을 토대로 감사하게도 집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오렌지색 벽을 따라 마우로의 작품들을 감상했고 그들이 하나씩 모은 집 안 소품들을 구경했다. 선반에 놓인 여러 종류의 위스키와 거실 구석에 풍성하게 자리 잡은 탐스러운 장미를 보면서 감탄했다. 타인의 취향을 엿보는 일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을 동반한다.
그 이후 우리는 리디아의 집에 초대받아 같이 와인을 나눠마시기도 하고, 주말 아침이면 옥상에서 리디아와 함께 운동했다. 나는 딸기를 가득 넣은 크레페 케이크를 만들어 문을 두드렸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올린 호떡을 같이 즐겼다. 이웃이 생기면서 집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