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에게 이해한다 말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 앞에 앉은 내 눈에는 당신만 보일 뿐
당신이 바라보는 것을 나는 볼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당신을 이해할 뿐
당신이 바라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당신과 공감한다는 것은
마주 보고 앉아 당신을 바라봐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방향으로 앉아 당신이 바라보는 것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당신이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공감한다는 말은
마주 보며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무책임하게 내뱉는 값싼 말이 아닌 이유입니다.
이제는
당신 곁에 앉아
당신과 함께 바라보며
당신이 되어
공감하는 내가 되고 싶습니다.
- 소향, ‘공감’ -
고창 선운사로 향했다. 백제시대 승려검단이 창건한 천년고찰로 대웅전 뒤 아름다운 동백숲으로 유명한 절이다. 단풍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온갖 나무들이 녹음을 자랑했다. 그 옆으로는 계곡물이 산을 깨우고 있었다. 물소리, 벌레소리, 새소리는 싫지 않을 정도의 음파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계곡물이 이상했다. 뿌연 색이었다. 마치 고여서 썩은 물처럼 검은색이 감돌았다. 그 속으로는 나무의 녹음이 반영되어 또 다른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선운산에 많이 자생하는 도토리, 상수리 등 참나무과의 낙엽에 함유된 ‘타닌’이라는 성분 때문이라 했다. 마치 묵 색깔처럼 오염된 것처럼 보여 오해 받기 십상이었다.
염색원료로도 이용하는 타닌성분이 바위에 침착된 것이라 했다. 물과 융화되어 하나가 되었다. 반면 물에 잠시 투영된 나무는 불안한 그림처럼 바람과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거예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송창식, ‘선운사’ -
연주소리에 맞춰 절로 가는 내내 송창식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설운 날’에 동백꽃이 후두둑 지는 모습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동백꽃 지는 계절이 아닌 걸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1.4km 정도 산속으로 들어가니 선운사가 나왔다. 때마침 늙은 스님이 설법을 하고 있었다. 배롱나무 사이로 스님과 신자들이 슬며시 보였다. 맞은 편 만세루에서 녹차 한 잔을 더하니 이보다 더 좋은 힐링이 있을까 싶었다.
대웅전 옆으로 돌아가니 보고 싶었던 지장보살이 나왔다. 지장보살은 미래불인 미륵이 오기 전까지 지옥에서 인간을 구제해준다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지장보살을 처음 본 것은 일본에서였다. 일본은 정토신앙이 보급된 헤이안시대 이후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신앙이 깊어졌다. 지장보살이 아이를 앉고 있는 모습 때문에 아이의 안녕과 건강을 지켜주는 보살로 인식되어 전국적으로 조그만 석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오지조상(おじぞうさん)’이라 했다.
교토 골목길을 걷다보면 수도없이 오지조상을 발견하곤 했다. 아이의 안녕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담아 간절히 그 앞에서 기도를 했었다.
아이는 세상에 안착하기까지 불안한 존재이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쉽다. 부모는 그런 아이의 심리를 잘 파악해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어쩌면 부모는 심리상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심리전문가 칼로저스는 인간중심적 심리상담을 강조했다. 그 해법으로 ‘공감’을 제시했는데, 형식적인 공감이 아닌 깊이 있는 공감이다. 깊은 공감이란 아이의 경험을 함께 하고 아이의 세계에 잠시 들어가 보는 것을 말한다.
고개만 끄덕이며 피상적으로 공감해주면 상대는 금세 알아챈다. 바로 영혼없는 공감이다.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공감을 해야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물에 비친 ‘반영’이 아닌, 타닌성분이 바위에 녹아들어 물색을 바꾸는 ‘침착’과도 같다.
선운사를 지나 2.7km 더 올라가니 산중턱에 세워진 도솔암이 나왔다. 절 옆 약수물에 목을 축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도솔암 뒤편으로 돌아가니 웅장한 바위에 새긴 마애불상이 나왔다. 크기와 위엄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가슴팍에 숨겨둔 ‘비기’는 전설에 묻혀 거대한 마애불과 함께 바위에 착상되어 있었다.
바위와 하나 된 진정한 융화이다. 불교가 수천년을 인간의 종교로 함께해 온 이유이지 않을까? 힘들고 괴롭고 병든 중생들을 깊이 있게 공감해 준 것이다.
종교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상대방을 진정으로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의 말과 생각을 깊이 있게 들어주고 공감해줘야 한다.
“왜?”
상대방이 문제를 제시했을 때 우리는 대뜸 이렇게 반문한다. 공감도 아니고 소통도 되지 않는다.
“내가 너라면 그럴 수 있겠구나.”
그는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할 것이다.
깊은 공감 후 그의 세계에 빠져 길을 잃으면 큰일이다. 다시 원래의 나의 길로 돌아와야 한다. 진정한 공감을 느끼고 내려오는 길, 길 하나가 다시 둘로 나뉜다.
보행로를 걸으며 내 인생의 길로 다시 안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