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애벌레처럼 가는 길이 있다
땀 흐르던 그 길의 저기쯤 마을이 보이는 어귀에는
오래 묵은 당산나무 귀신들이 수천 천수
관음의 손을 흔들며 맞이해서
오싹 소름이 서늘한 길이 있다
두리번두리번 둘레둘레
한눈을 팔며 가야만 맛을 보여주는 길이 있다
더운 여름날 쫒기 듯 잰 걸음을 놓는 눈앞에는
대낮에도 백년여우가 홀딱홀딱 재주를 넘으며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 무시무시한 길이 있다
서어나무 숲이, 팽나무 숲이, 소나무 숲이,
서걱서걱 시누대 숲이 새파랗게 날을 벼리고는
데끼 놈, 게 섯거랏 싹뚝,
세상의 시름을 단칼에 베어내고
도란도란 낮은 산길이 들려주는 이야기
작은 산골마을들이 풀어놓은 정겨운 사진첩
퐁퐁퐁 샘물에 목을 축이며 가는 길이 있다
막걸리 한 두잔의 인심이 낯선 걸음을 붙드는 길이 있다
높은 산을 돌아 개울을 따라 산과 들을 잇고
너와 나, 비로소 푸른 강물로 흐르고 흐르는
아직 눈매 선한 논과 밭, 사람의 마을을 건너는 길이 있다
- 박남준, ‘지리산에 가면 있다’ -
“저기 보이는 산이 무슨 산인가요?”
낯선이에게 말을 건 그는 바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지리산에 가 보셨어요?”
“아뇨, 아직...”
“그럼, 소중한 보물 하나 남겨뒀다고 생각하세요.”
구례여행을 떠나다 길가 휴게소에서 만난 어느 노인과의 대화는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라져 아름답다’의 작가 ‘구영회’
사진을 찍고 있던 나에게 말을 걸었던 그는 책 한 권을 쓱 내밀었기에 만남의 기억은 오래 머물렀다.
3개 도, 5개 시군, 15개 읍면으로 둘러싸인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으로 불린다.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만들고 남해 앞에서 마지막 여세를 몰아 지리산으로 용솟음쳤다. 백두대간의 완성인 셈이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최고의 면적을 자랑한다. 그 넓은 지리산에 3대봉으로 불리는 봉우리가 있다. 천왕봉(1,915m), 반야봉(1,734m), 노고단(1,507m)이 그것이다.
노고단을 택했다.
그 옛날 ‘노고단에서 백지영이었습니다.’로 유명했던 곳, 구례 사성암에서 어렴풋이 봤던 곳, 아니, 수많은 보물 중에 가장 캐기 쉬어 보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성삼재휴게소에서 바라보던 풍경도 이미 지리산 정상에 오른 듯했다. 주차를 하고 녹음이 우거진 산길을 올랐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평탄한 길이라 처음에는 만만하게 생각했다. 보물을 이렇게 쉽게 캘 수 있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초등학생 시절 소풍이 떠올랐다. 소풍날이 다가오면 보물 캘 생각에 들떴었다. 소풍이라 해봐야 매번 학교에서 8km 떨어진 ‘아산만’이라는 관광지에 가는 게 전부였는데, 도착하면 언제나 보물찾기를 했다.
선생님들이 미리 가서 아산만 공원 뒷산에 보물쪽지를 숨겨두었을 터. 공책, 연필, 크레파스, 그리고 꽝, 글자가 적혀있을 쪽지를 바위틈, 나무밑 샅샅이 뒤지며 찾았다.
“찾았다!”
누구 하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여기저기서 친구들의 함성소리가 들렸지만 결국 나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보물이 있을 만한 장소만 돌아다닌 결과였다. 학생들이 보물을 쉽게 찾는다면 낭패일 것이고, 자존심도 상할테니 예상치 못한 곳을 공략했어야 했다.
지름길을 택했다.
추억을 떠올리며 반 정도를 오르니 두 갈림길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평탄한 임도, 그러나 거리는 두 세배나 멀었다. 질러가는 길은 거리상으로는 가까웠지만 대신 강도가 심할 것만 같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가파른 계단 길과 자갈 언덕길이 이어졌다. 몸에서는 땀이 나고 숨은 가빠오고, 가장 힘든 건 역시 발바닥이었다. 울퉁불퉁 자갈길은 걷기에 불편하고 아팠다. 다행인 것은 오를수록 여름이 사라진다는 것.
노고단 대피소를 지나 또 한참을 돌길과 싸웠다. 훤히 정상이 보이는 노고단 입구에 이르니 구름 위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이마의 땀방울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노고단까지의 나무계단은 하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인지 교체해야 할 정도로 낡았다. 드디어 노고단 정상에 오르니 원뿔형 돌탑이 먼저 반겨주었다. 노고단은 신라 화랑국선의 연수도장이며 산신제를 하는 제단이었다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정도로 여느 산 정상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늙은 시어머니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 하여 ‘노고(老姑)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지리산의 모습은 황홀했다. 구름으로 뒤덮이니 더욱 영봉다웠다. 장엄한 산 위에 깔린 구름은 마치 곰탕 진하게 우려낸 것처럼 보였다.
노고단 비석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찍었다. 보물 하나를 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쉽게 내려올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구름이 지나가고 걷힐 것만 같았고, 그러면 보물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보물은 쉽게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구름은 꼬리를 물고 지나가고 있었고, 지나가면 되레 더 큰 구름이 몰려왔다. 슬며시 보이는 풍경에 아쉬움은 더했다.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내려가기로 했다. 애써 보물을 캐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품어두기로 했다. 그래야 다음에 또 올 수 있으니.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 보물을 찾을 수 있다.
- 심광주 LH토지주택박물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