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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Jun 16. 2022

그의 이름은 찰리

또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긴 수염을 세게 잡아당겼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귀를 까뒤집어도 그는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꼬리를 잡아당기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큰 덩치의 몸통 위에 나는 누워 버렸다. 나 같으면 벌써 도망갔을 텐데 그는 그냥 버티고 나의 성가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태어난 동네, 왕십리에서 골목대장이었다. 앞집에 사는 승렬이와 상렬이, 뒷집 사는 우진이와 동생 봉창이, 윗동네 사는 주연이까지 모으는 건 당연히 나였다. 상왕십리 애들은 끼워 주지 않았다. 게임의 롤을 정하는 것도 나였다. 잣치기, 오재미,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 왕십리 행당 시장 앞 골목은 나의 세상이었다.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면 저 멀리서 엄마의 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흙장난으로 손과 코 밑은 까맣고, 졸리고 피곤한 눈을 하면서도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오는 나는 항상 찰리한테 인사를 했다. 찰리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성가시고 괴로웠겠지만, 여섯 살 말괄량이 꼬마의 하루 마무리는 찰리와 반갑게 저녁 인사를 하는 것을 분명히 찰리는 알았을 것이다.


찰리는 메리의 아들이다. 찰리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찰리는 매일 내 뒤에 서 있었다. 내가 대문을 열고 나가 놀아도 문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문 앞에 앉아서 왕십리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집에 들어가면 창문 밖에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밖에서 내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나는 찰리가 언제 자는지 궁금했었다.


어느 날, 대문 밖에 앉아서 친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도 밖에 나온 적이 없었던 메리가 가만히 내 옆에 앉았다. 나를 쳐다보는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주둥이로 내 팔뚝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메리는 결심이나 한 듯 일어서더니, 행당시장 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메리를 불렀다. 어디 가냐고,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엄마를 불렀다. 메리가 혼자 어디로 가버렸다고...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시장 골목 메리를 찾으러 다녔다.


메리가 사라지고 찰리는 더 의젓해졌다. 자신이 가장이 된 것을 알았나 보다. 메리가 있을 때는 찰리가 슬금슬금 나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메리 실종사건 이후 찰리는 나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사춘기가 되고 나는 찰리랑 노는 게 재미없어졌다. 수염, 귀, 꼬리를 당기는 일도 없어졌다.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엄마에게 사춘기 짜증을 내는 나를 찰리는 아직도 밖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찰리 밥 주는 일도 싫증이 났다. 그 녀석은 밥은 안 먹고 자꾸 나를 핥았다. 개 침이 묻으면 내 피부는 빨갛게 달아오른다. 바로 비누로 씻지 않으면 열꽃이 피는 아토피 사춘기한테 털이 다 빠진 늙은 찰리는 귀찮은 존재였다.


며칠 후, 찰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없어진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몇 년 전 갑자기 사라진 메리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빠는 메리와 찰리 모두 집을 나간 이유는 죽기 위해 나갔다고 하셨다. 충견은 늙어서 집안에서 죽으면 집주인이 슬퍼하고 처리하기 힘들까 봐 죽기 바로 직전에 나간다고 하셨다.


찰리가 죽으러 나가기 전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막아섰다. 저리 가라며 다그치는 나에게 그는 다 말라버린 코를 가져다 댔다. 수염을 당기라는 뜻이었다. 자꾸 머리를 들이댔다. 귀를 가지고 놀라는 눈빛이었다. 축 처진 엉덩이가 부드럽게 내 종아리를 스친다. 꼬리를 당겨도 된다는 의미였다.


있는 힘껏 귀찮게 해서 보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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