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환상의 종말

에리히 프롬의 관점에서 본 『위대한 개츠비』

by 희구


“결국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오후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데

허망한 꿈만이 홀로 남아 싸우고 있었다.”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는 화려한 파티와 사랑의 환상이 뒤섞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존재의 고독과 의미 없는 욕망의 허망함이 깊게 깔려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사랑은 능동적인 활동이며, 자기 초월을 통한 합일이다’라고 말한 에리히 프롬의 이론이 떠올랐다. 프롬의 사랑론은 개츠비가 추구한 사랑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는 현실의 데이지가 아니라, 가난했던 시절에 자신이 꿈꾸어 만든 이상화된 데이지다. 그는 진짜 대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다시 얻으면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라는 환상 속 대상을 사랑한 것이다. 프롬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사랑이 아니라 소유이다. 개츠비의 환상 속에서는 데이지는 언제나 욕망의 도구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가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릇된 환상의 종말’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데이지는 그가 꿈꾸던 존재가 아니었고, 그녀는 끝내 속물적인 삶으로 돌아가 버린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얻기 위해 부를 쌓고 정체를 감추고 수많은 밤을 파티로 채웠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허공에 흩어져 버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그를 ‘위대한’ 개츠비라 부른다. 왜일까? 나는 그것이 그가 끝까지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나의 믿음을 따라갔고, 그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롬이 말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었기에, 끝내 붕괴되고 만다.


에리히 프롬

사랑은 환상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의 성장과 자율성을 함께 도모하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다. 개츠비는 현실 속의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보상과 욕망의 완성을 사랑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시작부터 실패를 예고하고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단지 한 남자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현실을 이상으로 착각하고, 그 이상에 나를 소모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착각의 끝은 늘 공허하고 씁쓸하다. 프롬의 말처럼, 진정한 사랑은 ‘함께 자라는 것’이다. 개츠비에게 그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있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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