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고베는 볼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두 번째 오사카 방문이다. 내 인생 첫 해외여행이 오사카였는데 2년 만에 다시 영광스럽게 오사카 땅을 밝게 되었다. 2년 전 당시를 기억해 보면 저녁 7시쯤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해 약 2시간이나 입국 수속을 하는 그 지루하고 처음 경험하는 놀라운 과정에서 진을 빼고, 9시가 다되어 공항을 나오니 뭘 타야 될지 몰라 헤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랬던 첫 경험 이후 매년 일본을 찾았다. 다음 해에 후쿠오카를 방문했고, 또 그다음 해인 올해에는 도쿄를 갔었다. 그동안의 내공이 조금 쌓여서였을까? 공항을 나와 전철을 타는 것들이 이제는 전혀 헤매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 올랐으니 일본어를 하나도 못하는 나에게 스스로 대견스럽다.
보통 여행에 앞서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우기 마련인데, 이번 여행은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타 항공 얼리버드 항공권이 오픈 시작한다는 스마트폰 알람에 무심코 접속했다가 정말 운 좋게 예매에 성공했다. 특별히 오사카를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올해는 해외여행을 꽤 갔던 터라 더 이상의 해외여행은 계획에도 없었지만 왕복 87,000원이라는 단비와 같은 가격은 계획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 없이 무조건 예매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목요일 점심때 출발해 토요일 오후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일정이 매우 짧았고, 또 오사카의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일정은 아니었다. 항공권 예매 후 바로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매했는데 난바역 인근의 엄청 깔끔한 숙소를 2박 90,000원에 예매했다. 이쯤 되니 드는 생각이 ‘아.. 이번 여행 왠지 컨셉을 초절약 빈곤 여행으로 잡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행하진 않았다. 다만 분명한 계획은 한 가지 있었는데 ‘지난번에 보았던 오사카와 교토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보자’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번 여행은 오사카 여행이라기보다는 고베와 나라 일대 여행기이다.
오후 1시 30분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전철을 타기 전에 일본의 방사능 공기를 맡아볼 겸 잠깐 공항 밖에 머물렀다. 처음 느껴보는 9월의 일본은 비가 와서 그런지 조금 습하고 더웠다. 다시금 공항으로 들어와 난바역으로 가는 난카이 선 전철을 탔다. 한국에 있을 때 미리 구매해둔 간사이 스루패스를 이용해 티켓 예매고 뭐고 하지 않고 바로 통과했는데 묘하게 그런 내 모습이 뿌듯하기도 하고 ‘나 여행 레벨이 이 정도로 많이 올랐구나’ 하면서 괜히 혼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대게 공항에 처음 도착하면 공항에서 헤매는 시간들이 있기 마련인데 너무 쉽게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난바역으로 이동하는 난카이 선 전철에는 거의 대부분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소란스러운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한 명은 영어를 매우 잘하는 일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키가 엄청 큰 흑인이었다. 두 사람은 전철 속 모든 소음을 뛰어넘는 데시벨로 아주 시끄러우면서도 즐겁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 조용한 나라 일본의 지하철에서 꼭 두 사람만 떠들고 있었다. 다소 경박스럽게 까지 느껴졌지만 주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워 보이는 그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한국에 있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어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을 것들인데도 다른 나라에 오게 되는 작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인상 깊고 기억에 남게 되는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얻어지는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해외여행은 다른 나라의 땅을 밟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참 설렘이 가득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해외여행 전도사는 아니다.
오후 3시. 난카이 난바역에 도착했다. 모든 일정들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난바역 밖을 나와 숙소를 찾아가는 동안 눈앞에 보이는 일본의 풍경들은 매번 우리나라의 무엇들과 자꾸 비교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여러 환승구역이 겹치는 중심 지하철 역사는 지하부터 지상까지 주변이 모두 대형 쇼핑센터 같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렇긴 한데 좀 묘하게 다르다. 우리나라는 지하철역 따로 지하상가 따로 그리고 거기에 백화점 또는 쇼핑센터가 붙어 있는 것 같은 그림이라면 일본은 지하상가부터 해서 전체가 하나로 묶여있는 쇼핑센터 같다랄까? 흡사 후쿠오카의 캐널시티와 같은 그런 느낌으로 지하철 역사 전체가 거대한 백화점 같은 기분이 많이 들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은 계속해서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빅카메라에서 열심히 휴대폰을 파는 점원들을 지나, 건물의 주차를 안내하는 주차 아저씨의 활동적인 얼굴 표정을 지나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정말 이 가격에 이런 방을 얻을 수 있어 감사할 정도였다.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갖춰져 있었고 무엇보다 혼자 단독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 일정은 매우 짧기 때문에 가방 속 무거운 물건들을 빼서 무게를 줄인 후 고베로 바로 떠나야만 했다. 지금 떠나야 고베의 야경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때마침 빗방울이 계속 굵어지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우산을 사지 않았는데 그냥 다 젖는다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베로 떠나는 전철을 타는 과정에서도 느낀 풍경들은 계속해서 우리나라와 비교하게끔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거의 대부분이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있는 반면에 일본은 스크린 도어 대신 최소한의 안전가드만 설치되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후쿠오카 여행에서도, 도쿄 여행에서도 일본에서는 전면 스크린 도어는 잘 못 본 것 같다. 전철의 맨 앞 운전석은 오픈되어 있어서 승객들이 안전하게 승차하는지를 점검하고 있었고, 전철 밖에서도 직원이 승객들이 잘 탔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 전철을 기다려야지 하면서 정말 무의식적으로 어떤 구역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뭔가 모르게 기분이 쌩해서 바닥을 보니 여성 전용칸이었다. 때마침 들어온 전철에서 그 칸에 탑승한 승객들을 보니 정말 모두 여자들 뿐이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부리나케 옆 옆칸 전철에 탑승했다. 탑승후 여성전용칸에 대해서 바로 검색을 해보니 여성전용칸은 우리나라도 도입하니 마니 하는 논란이 많고, 실제로 도입을 해도 시간제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럴 거면 차라리 남성 전용칸도 만들어 달라는 반발도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미 빨리 도입해서 잘 운영하는구나 싶었지만 뭐 일본도 일본 내에서 성차별이라며 이런저런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내가 탄 전철이 고베행 직통이 아니었던 것인지 2번 정도 갈아 탄 후 고베에 도착했다. 지하를 나오니 이미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고베의 야경이야 어두워지면 더 잘 보이겠지만 다른 것들은 어두워지면 볼 수가 없으니 나는 바로 이쿠타 신사로 향했다. 이쿠타 신사로 향하는 그 길은 이쿠타 로드라고 따로 명명해 놓고 있었는데 약간 남포동 옆 국제시장 분위기가 많이 났다. 걸어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즐비한 길에서 먹는 떡볶이와 오뎅을 발견했는데 일본은 한술 더 떠서 맥주까지 먹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어찌나 그 오뎅국물이 탐이 났는지 모르겠다.
이쿠타 신사는 태양신을 모시는 신사라고 하는데 일본 신사에서 늘 느끼는 거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그럼 왜 감흥도 없는데 힘들게 거기까지 가느냐고 물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처음 가보는 지역에 어떤 역사적인 공간을 가는 것은 그냥 몸에 베여있는 일종의 습관과 같은 거랄까. 게다가 목적지를 정해놓고 그곳을 찾아가고 이동하면서 보이는 풍경 속에서 여러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기왕이면 역사적인 공간은 잊지 않고 찾아가는 편이다. 신사의 규모는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사실 올해 도쿄 여행에서 본 망할 놈의 야스쿠니 신사의 규모에 깜짝 놀란 터라) 나름 번화가와 많이 인접해 있어서 그런지 비가 오는 평일 저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외국인 3인방이 눈에 띄였는데, 이 외국인들도 아마 나랑 비슷한 생각으로 고베 왔으니 그나마 지금 현재의 고배의 모습과 다른 느낌인 이곳 이쿠타 신사를 방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보았다.
신사가 고베의 맛보기였다면 메인은 고베의 야경이다. 적절하게 하늘은 어두컴컴해지고 있었고 빗방울은 계속해서 굵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도착해서 아직 한 끼도 못 먹었다.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이쿠타 거리에 있는 아무 라멘집에 들어갔다. 역시나 일본 라멘집은 들어갈 때 그 특유의 사리곰탕 국물 같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스페셜 라멘이라는 메뉴가 맛보다 양이 많아 보여서 시켰는데 라멘 속에 족발 같은 고기들이 들어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맛있었다. 엄청 맛있진 않았고 그냥 맛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실 웬만해선 모든 음식들이 다 맛있다.
허기를 달랬으니 소화도 시킬 겸 구글 지도를 켜고 걸어서 고베 포트 타워로 향했다. 비 때문에 그런지 GPS가 자꾸 수신율이 떨어져서 조금 애를 먹었다. 이쿠타 신사에서 고베 포트 타워까지 이동하면서 생각보다 많이 걷게 되었는데 걸어가면서 보이는 비 오는 평일 저녁의 풍격은 굉장히 적막했다. 아니면 이놈의 구글 지도가 나를 일부러 적막한 공간으로만 적절하게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분위기는 길가다 일본 깡패를 만나도 지나가는 누군가가 신고해주거나 구해줄 틈도 없이 꼼짝없이 당할 것 같은 그런 음산한 기운이 풍겼다.
음산한 기운을 헤쳐 빛을 따라갔다. 저 멀리 뭔가가 반짝반짝 거리는 개선문 같은 게 보였다. 이제는 구글 지도고 뭐고 간에 그거만 보고 계속 걸었다. 그리고 더 이상 비를 맞고 걸을 수 없겠다 싶어 근처 편의점에 들려 드디어 비닐우산을 구입했다. 사실 우산을 구입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버리고 올 우산을 구입한다는 게 꽤나 돈 아까운 일이었지만 계속해서 비를 맞으면서 쏘다니다가는 몸살이 나서 여행을 망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제서야 우산을 구입했다. 우산 쓰고 걸으니 한층 발걸음이 여유로웠다. 그 개선문 같은 불빛에 다다르고 조금 더 걸으니 오른쪽에는 조선소가 보였고(처음에는 무슨 군사시설인 줄) 왼쪽에는 하버랜드 관람차가 보였다. 계속해서 어두운 공간만 걷다가 급격히 주변의 모든 공간이 일순간에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에는 고베 포트 타워도 보였다. ‘아! 다행이다. 잘 찾아왔구나’
찰칵, 찰칵. 고베의 야경을 카메라에 담고, 적절한 셀카질을 수행한 뒤에 고베 포트 타워로 이동했다. 이상하게 일본은 놀이동산이 아닌 도시의 특정 공간에 관람차 같은 게 많은 것 같다. 도쿄도, 오사카도, 후쿠오카도 모두 다 놀이동산 아닌 곳에 관람차가 있다. 고베 포트 타워에 도착해서 표를 끊으려고 하니 표를 끊는 직원은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어르신이었다. 간사이 스루패스를 통해 할인을 받으려고 패스권을 보여주니 정말 능숙한 영어로 할인을 해주셨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서 뭔가 우리나라 어른들의 은퇴 이후 재교육과 재취업에 대한 어떤 가능성 같은 것들을 엿볼 수 있었다.
고베 포트 타워에 올라가니 비 때문에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매번 여행에서 새로운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이런 타워에 올라가다 보니 특별한 재미 같은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이 비까지 오는 날씨에 힘들게 고베까지 와서 고베 포트 타워에 발도장 찍고 간다. 뭐 그런 느낌 정도랄까. 그래도 하늘에서 내려다본 고베 야경은 아름다웠다. 내 카메라가 그 빛들을 다 담지 못해서 문제였지만.
타워에서 내려와 다시금 걷고 또 걸어 전철을 타고, 난바역으로 그리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첫날의 일정이 이렇게 마무리 되려 하고 있었다. 뭔가 부산에서부터 시작해서 급박하게 진행된 하루였다. 숙소로 향하는 동안 허기가 져서 편의점에 들려 스파게티와 이상한 크림치즈 그라탕 같은 것을 사서 들어왔다. 정말이지 일본 편의점 음식은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맛있다. 내일 아침 얼굴이 퉁퉁부어 호떡 같아 보여진다 한들 기어이 그렇게 두 그릇을 먹고 씻지도 않고 잠들었다. 첫날! 참 고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