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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말룡 Jan 12. 2020

1. 계속 건강할 것이라는 자만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는 늘 소망과 다짐이 가득 찬 한 해이다. 나는 미리 운세도 보았다. 인터넷 무료 운세였지만 이 포털 저 포털, 이 은행 저 은행 돌아다니면서 여러 군데에서 올 한 해 운세를 점쳐보았다. 결과는 공통적으로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작년보다는 더 희망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아 올 한 해는 정말 잘 풀리겠구나" "작년보다는 더 좋겠구나"라고 혼자서 2020년을 열심히 살아갈 상상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몸이 탈이 났다. 약 3년 전에 치질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포경수술 이후 나에게 '수술'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당시에 꽤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병원을 퇴원하면서 "아! 진짜 술 좀 줄이고, 기름지고 인스턴트 음식 끊어야겠다"라고 여러 번 다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아마 그 다짐은 길어야 한 달이었을 것이다. 이후 언제 치질 수술했냐는 둥 다시금 정상인처럼 살아갔다.


그래서 탈이 났을까? 항문 쪽에서 뭐가 만져지는 것 같아서 이전에 수술했던 항문외과를 찾으니 치질이 재발했다고 한다. 사실 이 소식은 12월 28일 날 진료를 보고 알았다. 원장님은 지금 바로 수술할 수 있다고 말하셨지만 나는 지금 바로 수술을 하면 왠지 연말을 병원에서 보내게 될 것 같았다. 증상이 심하면 새해를 병원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기 싫었다. 누가 새해를 병원에서 시작하고 싶을까? 그래서 한주 연기해서 1월 4일에 수술을 받기로 했다.  


일주일 뒤 수술 날짜가 왔고, 병원을 찾았다. 치질 수술받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오늘날 치질 수술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길어야 30분이면 모든 수술이 끝난다. 전신마취도 아니고 하반신 마취라서 정신도 멀쩡하다. 나는 그 멀쩡한 정신을 놓지 않은 채 무사히 두 번째 치질 수술을 끝냈다. 원장님은 1박 2일 입원하고 바로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통증도 견딜만했다. 늘 그렇듯 퇴원할 때는 "진짜 술 줄이자! 음식들도 제대로 먹자!"라고 생각하면서 퇴원했다. 그런 다짐이고 뭐고 간에 그냥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퇴원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 한 2주 정도만 고생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월요일이 되어 정상적으로 직장에 출근했다. 바쁜 월요일이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나니 눈 깜 박할 사이에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내 몸도 '큰일을 보고 싶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사히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갔다. 미지근한 물로 항문 근육을 조금 이완시키고 큰일을 보려고 했다. 정말 찢어지는 고통이었지만 무사히 거사를 치렀다. 힘들었지만 뿌듯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찰나에 몸에서 더 무언가가 나오는 것이었다. 바로 피였다. 핏덩어리들이 서로 엉켜 붙으면서 쏟아졌다. 처음에는 수술 직후니까 당연히 피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1시간 뒤에 또 '큰일 보고 싶어'라고 신호가 왔다. 아니 이상하다? 난 먹은 게 없는데 왜 또 신호가 오지? 잔변이 남은 걸까라고 생각하며 다시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변이 아니라 오로지 피였다. 1시간 전보다 더 많은 피 덩어리들이 엉켜 붙어서 나왔다. 너무 많이 쏟아져서 뭐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1시간 뒤 또 신호가 와서 피를 쏟아냈고, 그리고 또 한 시간 뒤 피를 쏟아냈다. 어느덧 11시가 넘어갔다. 잠을 자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 지금 자면 쇼크로 못 일어날 것 같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심각한 상상력이 동원되었다. 하필 이날 어머니도 통영에 있는 누나네에 조카들 돌보러 가시느라 집에 없었다.


계속되는 불안감과 뭐가 심하게 잘못된 것 같다는 마음이 커져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심장박동수가 계속 켜져 가는 것 같았다. 애꿎은 삼성 헬스 어플을 켜고 심박수와 산소포화도를 체크하면서 심박수가 너무 빠른 건 아닌지 산소포화도가 더 내려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덧 새벽 두 시가 넘었다. 두시가 넘어가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잠을 자려하지 않았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파카를 껴입고 집 근처 응급실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응급실을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밖에는 새해맞이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두발 멀쩡히 119 구급차를 타지 않고 응급실로 향하는 내 마음은 너무나도 처량하고 쓸쓸했다. 어느 누구 하나 나를 태워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외로웠다. 


그렇게 응급실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응급의학과 의사가 피검사를 통해 헤모글로빈 수치를 확인하자고 했다. 하지만 지금 확인하는 건 피를 쏟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고 우선은 지혈제를 맞고, 수액을 맞으면서 해가 뜰 때까지 응급실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해가 뜨거든 수술했던 병원을 다시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응급실에 누웠다. 집보다 차라리 이 응급실에 누워있는 게 더 마음이 안정되었다. 손가락에 꼽혀있는 옥시 메타 기계(산소포화도를 측정하는)도 내 혈압과 심박수를 체크하는 모니터도 그 모든 장비들이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그것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구나 싶었다.


혼자서 응급실 이라니.. 내 팔자야
그냥 수액을 맞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수액보다는 옆에 누군가(간호사)라도 있어서 마음이 안정되었다.


평일 새벽 응급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내가 갔던 날이 조용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외로 두 발로 걸어서 응급실을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침이 멎지 않고 계속돼서 오는 사람도 있었고 저녁에 무얼 잘못 먹었는지 계속되는 오바이트로 찾은 여학생도 있었다. 내가 누워있는 시각에서는 그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그 학생을 할머니가 손잡고 응급실로 데려왔다. 할머니는 의사에게 말했다. "우리 손주가 뭐를 잘못 먹었는지 계속 토를 해요. 얘가 내일 학교도 가야 하는데 이래 자꾸 토를 하면 안 되는데 한번 봐주세요 선생님". 의사는 수액처방을 냈고 그 여학생도 내 옆 옆 옆 자리에 누웠다. 내가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 학생을 볼 수 있었다. 수액을 맞는 동안 학생은 잠이 든 것 같았는데 할머니는 잠들지 않았다. 누워있는 학생 옆에서 손을 꼭 만져주고, 다리도 주물러 주고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 나도 내 상황도 이렇게 개떡 같은데도 손주를 대하는 그 할머니의 모습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할머니 입장에서 저 손주는 얼마나 귀한 손주일까? 저 손주는 저렇게 잠자고 있으면서도 알까? 할머니가 저렇게 극진하게 자신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을? 너무 슬퍼서 계속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왜? 내 옆에는 왜? 아무도 없지?"라는 생각이 더 슬프고 서러웠다. 참 청승맞은 일이다. 피를 계속 쏟아내고, 잠이 안 와서 두발로 멀쩡히 응급실 와서는 이제는 처 울고 자빠졌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구나" "나는 아무런 자신도 없었구나" "내 자신감은 그냥 허상, 허세 같은 거였구나".


지금 이 시간에도 혼자만의 삶을 만끽하고 행복해하고 있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건강하시죠?"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은 스스로 챙겨야 합니다,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을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혼자 살아감을 준비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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