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시집
그래픽노블 작업을 하다가 긴급하게 써야하는 이야기가 생겼는데, 그림까지 그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에 분노해서 뜬금없이 시를 써버렸습니다... 봄날의 책에서 만드는 시집들 가볍고 손에 쥐기도 좋고 예쁘니 많이 읽어주세요. 다시 하던 작업하러 저는 그럼 이만..
시적 분노로 쓴, 77편의 픽션
『스프링 에나멜 컬러풀』은 시적 분노로 쓴 픽션이다. 언어 작용이 공동체의 마음속에 만들어내는 권력과 환영의 장막을 찢고, 불처럼 솟아오른 날것의 감정이 물이 되어 모두의 신경 속에서 흐르는 꿈의 기록이다. 대기 중에 흩뿌려진 물방울 입자들이 빛을 반사해 하늘 위에 무지개를 띄워 올리듯, 이 시집은 다중의 목소리와 침묵이라는 하얀 잉크로 77편의 시가 방울방울 모이며 하나의 서사를 생성한다. 이 책이 그려내는 포물선이 사건을 고정시키는 말들을 움직일 만큼 충분히 긴 지렛대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은 “너만 침묵하면 괜찮다”는 집단의식을 거스르며, 말하는 주체의 행위가 타자의 입을 통해 발화되지 않으리라는 가부장적인 언어 작용의 기대를 배반한다. 친밀한 관계 속 권력 작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집단적 폭력에 관해 말하기 위해, 언어 작용 아래 눈에 보이거나 말해지지 않는 ‘영토화’의 과정을 가시화하며, 영원과 시간-잠과 꿈, 일상의 망각에서 깨어날 가능성을 탐색한다.
시집의 제목 ‘스프링 에나멜 컬러풀’에 관하여
‘Spring Enamel Colorful’은 한밤중에 비가 내리면 물기 맺힌 사물들이 빛을 머금으며 생기를 띠고 색이 깊어지는 작용을 그려낸다. 비 온 뒤 잠시 나타나는 쌍무지개는, 사물들이 본래 색을 지닌 것이 아니라 빛의 반사로 인해 색이 있는 듯 보일 뿐임을 상기시킨다. 이는 언어가 우리의 생각·기억·관계·감각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닮아 있다. 쌍무지개의 선명한 첫 번째 무지개와 흐릿한 반사상의 이미지는 질문을 던진다. 나의 생각과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굳게 믿어온 말들이, 실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반영해온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마주한 언어와 이미지들이 권력 작용에 의해 응축된 결과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는.
Spring은 사계절의 봄이자, 동시에 ‘본다(see)’는 의미의 봄으로, 화산 지대에서 끓어오르는 온천(hot spring), 튀어 오르는 용수철(spring), 탈출과 해방을 뜻하는 ‘to spring’의 다의적 울림을 담아낸다. Enamel은 금속·유리·도자기의 표면을 광택과 색으로 장식하는 유리질 재료이자, 치아와 물고기 비늘을 감싸는 단단한 표층으로, 늦봄 새로 돋아난 잎의 빛나는 표면과 붉은 기운, 멀리서 보이는 연둣빛을 연상시킨다. Colorful은 형형색색, 흥미진진함, 파란만장함을 아우르며, 세계의 균열과 폭력 속에서 발견한 다정하면서도 잔인한 인간 내면의 다채로운 감정과 입체적인 면면을 드러낸다.
시집의 등장인물 및 주인공 도드에 관하여
도드: 불에 탄 서술자.
개나리: 도드를 자기 거울로 삼지 않고, 도드로 보는 친구.
오렌지: 화가. 도드의 죽은 여자친구. 이름을 잃어버렸다.
새미: 패션 디자이너. 도드와 오렌지의 친구. 오렌지의 이름을 훔쳤다.
잘루트: 사진가. 도드의 어릴 적 친구, 였을까?
그: 도드의 연애 상대.
그 외의 이름들: 도드의 실패한 연애 상대들.
주인공 도드(Dôwd, דּוֹד)의 이름은 성경 속 등장인물 다윗의 히브리어 어근의 소리이다. 이 단어는 본래 “끓다, 달아오르다(to boil)”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지만, “사랑하다(to love), 친애하는 이(dear one), 친구(friend), 삼촌(uncle)”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도드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 소리에 사랑의 열기와 애정을 담은 호명을 동시에 품고 있다.
시집의 구성 및 사용 설명에 관하여
『스프링 에나멜 컬러풀』은 77편의 시로 이루어진 하나의 이야기이다.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나열되고 있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으며 주인공 도드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기억의 전쟁을 따라 읽어보기를 권한다. 지금 나에게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끝까지 의심하고 묻고 또 묻기를 권한다.
시집의 챕터를 구성하는 색깔들의 의미에 관하여
표지의 비눗방울에 맺히는 무지갯빛은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운색(Iridescence)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보석 내부의 층, 틈, 균열, 결함이나 손상이 의도치 않게 프리즘 역할을 하여 빛을 분산시키며 스펙트럼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각각의 챕터는 각 인물이 했던 말과, 인물들과 도드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구성되며 그를 통해 각각의 입장과 관점을 드러낸다. 하나의 서사에 다중의 서술자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각 색깔의 의미가 하나가 아닌 여럿일 수도 있다. 시를 읽으면서 각각의 색깔과 연결 지을 수 있는 단어들을 찾아보고 또 기록해보기를 권한다.
이 시집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독자들에 관하여
* 복수의 불가능성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 셰익스피어의 친구가 된 사람.
* 플래시백도 노스탤지어도 이제는 지겨워 과거의 기억을 내려놓고 싶은 사람.
* 한때 머물던 공동체를 떠나본 사람. 공동체 안의 권력이 작동할 때 그에 맞서본 사람.
* 애도의 계절을 건너온 사람. 상실 앞에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너인지, 그래서 내가 잃은 것은 누구인지 죽은 이와 오래 이야기 나눠본 사람.
* ‘지켜낸다’는 사랑의 의미를 물어본 사람. 타인의 가시를 가만히 쓰다듬어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