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뼈는 부러져도 마르지 않는다
손목을 다쳤다. 눈 내린 날 아침, 강아지들과 언덕을 산책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한 쪽발이 미끄러지며 몸의 균형을 잃는 순간 엉덩이나 허리는 다쳐서 안된다는 위기감이 재빨리 손을 내밀게 했다. 힘껏 땅을 짚은 손목에 타는듯한 통증이 훅 끼얹어졌다.
손목뼈는 부러지고 갈라지고 부서지기까지 했다. 하필이면 기존의 보험을 해약하고 메디케어를 신청해 놓은 터라 수술비와 치료비는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설마 며칠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랴 하고 보험을 먼저 해약했는데, 그 설마에게 옹골지게 당하고 만 셈이었다.
내 칠십 평생 이런 사고는 처음이었다. 역마살 낀 망아지라는 비난을 오히려 응원처럼 여기며 역마처럼 나돌아 다닌 삶이었다. 응당 굴곡이야 많았지만 몸을 다친 적은 없었다. 유년기에서 30대 말까지는 한국의 산천들을 도보로 방랑했고, 40대부터는 대륙을 종횡무진 자동차로 훑었다. 좁고 구부러진 길을 골라서 주행하며, 야영지에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해결하는 여행이었다.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에 만년설을 이고 있는 고산들도 몇 개나 넘었고, 그랜드 캐넌을 비롯해 자이온, 옐로스톤 같은 국립공원들의 길고 아름다운 트레일과, 이름 모를 험난한 산속의 트레일도 많이 걸어보았다. 그건 여행이 아니라 홈리스체험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홈리스란 집이 없다는 뜻이지만, 집이 없다고 다 거지는 아니었다. 집이 없어도 갈 곳이 있으면 거지가 아닌 나그네였다. 내 여행은 갈 곳이 많아도 너무 많았었다. 종내는 못다 가 본 길 위에서 삶을 마감하리라는 각오와 준비가 늘 되어있던 길이기도 했다. 그래 크고 작은 위험들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 지나고 때로는 내가 그 위험을 가까스로 피해 가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여행을 멈추게 하는 사고는 없었더랬다. 더러의 사람들은 그것을 운이라 했고 믿는 사람들은 단연코 기적이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어온 삶의 여정이 가장 지난하고 혹독한 것이라고 여긴다. 치 떨리게 가혹했던 자신의 과거에 복수하듯 살아간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많았다. 전쟁 직후에 태어난 또래의 대부분은 등 따시고 배불렀던 기억보다 치 떨리는 허기와 추위의 상처가 지배적일 것이라고 여겨 나는 내 과거사에 활활 분노하지는 않지만, 필요이상의 고생을 시킨 나 자신에 대해서는 자주 애증을 느껴왔다. 세상에 태어난 중대한 이유가 그것인 양 길만 보이면 무작정 내 달았던 유년시절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길까지 더듬으려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삶의 아주 많은 부분을 길 위에서 보냈다. 쉼보다 움직임이 훨씬 많았기에 늘 곤하고 지치기는 했지만 중단하거나 되돌아선 적 없는 기특한 내 몸이었다.
출생신고를 4년이나 미룰 만치 병약했던 아이, 국민학교 3학년이 되도록 출석보다 결석일이 더 많았던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하루도 결석을 하지 않는 튼튼이가 되더니, 도보로 세계일주를 꿈꾸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멈춰놓고 걸어 다닌 대룩의 오솔길도 만만치 않았다. 멕시코 국경에서 출발해 캐나다 국경에서 끝나는 PCT (Pacific Crest Trail) 계획을 염두에 두고, 코로나가 덮치기 전까지도 체력단련을 했더랬다.
그런 내가 여행지도 아닌 내 집 부근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것은 다만 손목뼈 하나가 부러진 단순한 의미의 사고가 아니었다. 직각으로 구부려 목에 걸머맨 팔은 내 삶의 여정을 부추기고 지탱해 오던 중요한 기둥 하나가 예고도 없이 꺾여버린 충격적인 아픔과 좌절이었다.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운전을 할 수도 없었다. 음식 장만과 설거지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상생활 자체가 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해 졌다. 기둥 하나가 꺾임으로 지붕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그로 인해 건물 전체가 위태로워진 형국이었다.
죽음 같은 절망이 내 숨통을 죄어왔다. 사실 그 좌절은 진작에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코로나의 위협으로 여행계획을 변경하면서 갈등이 기어들었고, 세 번이나 전염병의 공격에 쓰러지면서 절망이 엄습했다.
나는 유난한 알레르기 체질이다. 남들 다 맞는 독감예방주사 한 번 맞았다가 학업을 중단할 만치 심각하게 앓으며 몇 년을 고생했다. 의사는 그런 나를 위해 코로나 예방접종 불가능 확인서를 써주며 외출할 때 지참하도록 했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은 시절의 무능함 때문에 나를 힘들게 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온전한 유능함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예방주사를 맞지 못한 나는 남들보다 지독하게 전염병을 앓았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주여, 가자면 순순히 따라 갈 테니 제발 이렇게 아프게는 마소서...” 헐떡이며 기도했고, 그 독한 병치레를 세번이나 겪으면서 기력은 완전히 쇠퇴했다. 몸의 쇠약은 마음을 허약하게 했고 마음의 약함은 외로움이라는 중병으로 치달았다. 자유롭다고 여겼던 혼자의 삶이 외롭고 고된 것으로 곤두박질 치면서 탄탄하게 구축된 줄 알았던 노년의 독립성이 무너져 내릴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좌절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 손목이 부러졌다.
부서진 뼛조각들을 맞추어 고정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나사를 박아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나는 그냥 Cast (깁스)만 하자고 했다. 비용도 문제였지만 나사를 박아야 한다는 사실은 더 큰 문제였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쇳조각은 아닐테지만 금속 물체가 내 신체에 박힌다는 사실은 끔찍했다. 신체에 박히는 쇠붙이에 관대할 내 알레르기는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치료기간이 해를 넘길 수 있다는 말도 의사는 했다. 주변 사람들은 의사의 말을 따르라 권했지만 나는 나를 고집했다. 알레르기는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이해되지 않는, 병 같지도 않은 병이면서도 치명적인 병이었다. 그럼으로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결정할 일이었다.
손목의 치유는 기대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깁스한 손은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탓도 클 것이었다. 의사의 지시를 거역할 의도는 없었으나 삶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살아있는 것들은 의식주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일어나는 모든 것에는 손의 움직임이 필요했다.
동여맨 손목을 짊어지고 버티었던 4개월 남짓, 40번도 넘게 삶의 포기를 생각했다. 깁스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절망은 느슨해 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움켜 쥘 수 없는 손과, 깊이 사고할 수 없는 뇌와, 짧은 노동에도 헐떡이는 육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삶은 죽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70년을 넘긴 인생이라면 죽어도 그리 억울할 것 없다는 생각이 협공을 했다.
죽음을 준비했다. 우선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멀리했다. 억지 불만과 분노를 내세워 절연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반 일년을 보냈다.
갈퀴 모양으로 반쯤만 구부러지던 손가락이 차츰 주먹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고, 뒤통수에도 닿지 않던 손이 어깨죽지로 뻗치기 시작했다.
주변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먹으면서 입맛이 돌아오고 하얗던 긴 밤이 검은 휴식을 받아들이는 시간도 차츰 길어졌다. 삶이 조금씩 힘을 얻으며 죽음을 나무라고 밀어냈다. 나의 뼈는 부러졌지만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내 부러진 뼈는 무덤 속에서 파 낸 죽은 뼈가 아니었다. 생명으로부터 온전히 분리되고 바싹 말라버린 그것과 달리, 나의 손목 뼈는 여전히 따뜻한 피와 골수를 품고 살아있는 뼈였다. 살아있는 인간의 뼈는 부러지더라도 내부에 회복을 위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다시 붙어 이전보다 더 단단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번 부러진 뼈는 더욱 강해져서 같은 부위의 골절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나는 부러진 손목과 잃어버린 건강으로 인해 물심양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삶을 포기할 만큼의 좌절은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김질 하고 있다. 코로나와 손목의 골절로 인한 궁핍이 죽음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한 귀퉁이가 무너진 삶을 원상으로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그저 재점검의 기회로 받아들일 작정이다. 아직도 내 삶은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정이 남아있어, 부러진 손목은 마침표가 아니라 속도를 늦추라는 쉼표로 여기려 한다. 설사 점검후의 삶이 너무 짧을지라도 나는 이제 괜찮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