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건 잘 숙성되는 것
루시, 나의 미쿡엄마
“Are you free today?”
미쿡엄마 루시의 전화였다. 같이 외출을 하자거나, 뭔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그녀는 먼저 그렇게 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여든 다섯, 나의 생모가 세상을 떠난 나이였다. 인연의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듯한 그 숫자는 내게 별 다른 친숙한 감정을 주었다. 생전의 내 엄마와 닮은 점이 많다는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도도한 자존심과 깔끔함을 고집하는 처세술, 단정한 차림새, 젊은이들을 무색케 하는 생생한 정신건강... 닮은 것들이 참 많은 엄마들이었다.
“내가 오늘 우체국에 가는 것을 깜빡했지 뭐니. 나도 치매에 걸린 모양이다.”
정말 별 일도 아닌 데, 루시는 굉장히 씁쓸하게 말했다.
“아 엄마! 그럼 난 치매 중증이게요!”
나는 과장되게 펄쩍 뛰는 시늉을 했다. 일흔을 갓 넘긴 수양딸의 건망증이 아흔 살 넘은 당신보다 훨씬 심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 아침에도 스토브에 국 올려놓고 눈 치우러 나갔다가 국을 새카맣게 태웠다고요."
내 건망증이 저지른 크고 작은 일들을 되는대로 나열하는데, 루시가 미소지었다.
“너는 나 보다 하는 일도 많고 생각할 일도 많고... 잊어버릴 일도 많지.”
나도 미소로 답했다.
실상 할 일 많고 생각 많은 사람은 루시였다. 정갈하고 예쁘게 집안을 꾸미기 좋아하는 그녀는 침대시트나 타월을 때가 탈때까지 사용하지 않았고, 커튼이나 식탁 세트들도 식상해지기 전에 바꾸었다. 그것들은 주로 본인이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 벽걸이나 액세서리들도 만들어, 정성스레 쓴 편지와 함께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오늘 내게 전화를 한 이유는 그녀가 손으로 쓴 크리스마스 편지를 내 컴퓨터로 타이핑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흘려 쓴 펜글씨로 빼곡하게 채운 종이를 들고 루시가 나를 방문했다. 나는 옆에 앉은 루시가 읽어주는 내용을 콤퓨터로 받아 적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손으로 쓴 영어를 잘 읽지 못했다. 거의 읽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미국에서 주립대학을 나오고 대학원과정도 절반 가량 공부했지만 손으로 쓴 영어를 배울 기회는 없었다. 모든 읽기와 쓰기와 과제물들은 전적으로 컴퓨터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여러장의 카드와 선물을 받지만, 손으로 흘려 쓴 글이라 읽을 수가 없었다. ‘Mery Christmas’라든가 ‘Happy Birthday’ 같은 뻔한 글들만 짐작으로 읽을 수 있어서, 그것들은 마치 사용처를 잘 모르는 보석과 같았다. 답장을 보낼 수가 없어 더욱 난감했지만, 엄마 루시에게도 편지를 읽어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과대평가했는데 나는 그 평가에 못미치는 나 자신을 들키기 싫었다. 괜한 자존심이었지만 좀처럼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었다.
루시는 누구보다 바쁜 어른이었다. 노인센터에 나가 회원들과 모닝커피를 즐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점심에도 많은 약속들이 있었다. 일요일엔 교회에 가고, 마을의 잦은 축제와 행사에 참석했으며, 농산물 시장에도 부지런히 들렸다. 노환으로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는 이웃을 찾아보거나 치매로 인해 외톨이가 된 동무를 방문해 과거의 기억을 나눠주는 것도 그녀가 즐기는 일상이었다.
노인센터의 홍보, 월례행사와 경조사, 회원들의 생일과 결혼 기념일 따위에 관한 전단지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도 그녀가 오래토록 맡아 온 일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단한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손으로 모든 것을 만들었던 그녀는 나와 내 컴퓨터를 만나면서 방법을 바꾸었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빨리 간파해 내용에 어울리는 문구와 예쁜 그림들까지 삽입하여 칼라로 프린트를 해 주었다.
자락동에는 그런 일을 해 줄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시청이나 주민센터에서 공문서 복사나 인쇄는 할 수 있지만 글을 쓰거나 컬러 프린트는 부탁할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자락동 사람들은 펜과 종이를 즐겨 사용했다.
물론 내게도 우표를 붙인 성탄절 카드와 생일카드들이 배달되었다. 손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품이나 악세사리들, 수놓은 머플러나 셔츠 같은 선물도 있었다. 주로 교회 식구들의 것이었지만, 우리 멍뭉이들이 다니는 동물병원과 은행, 부동산에서 보낸 것들도 있었다. 바깥 세상에서는 흔하게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수작업 (Hand made) 제품이라고 하면 아낌없이 후한 가치를 매기는 미국에서도, 자락동 같은 시골이 아니면 귀한 것들이었다. 적자를 면치 못해 문을 닫는 우정국들은 점점 많아진다지만, 자락동의 우체국은 좀 더 오래 열려 있을 성 싶었다.
루시는 우체국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주민들 중 하나일 것이다. 올해도 그녀는 아리조나의 작은 딸을 방문하러 가기전에 내가 타이핑해 준 지인들에게 쓴 편지를 우편으로 보냈다.
당연하게도 그녀에게 배달되어 오는 우편물도 적지 않았다. 몸으로 할 일이 없으면 그녀는 받은 우편물들을 정리했다. 배달되어 온 신문과 잡지들을 읽고 십자말 풀이 책의 낱말 맞추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는 치매나 노환이 비집고 들 틈이 전혀 없을 것 같았다.
루시는 가끔 집안일을 도와 달라면서 나를 불러 커피와 다과를 즐기고, 동네의 행사나 축제에도 나와 가기를 좋아했다. 같이 할 사람들은 많을 것이지만 나와 함께 하기를 선호했다.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둘 다 막내로 태어나고 자란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버리지 못한 소녀적 취향이 꽤 많았다. 그렇다고 민망할 정도로 무지하거나 막무가내 철부지는 아닌, 좀 유난하고 쎈 언니들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또래보다는 인생경험이 풍부한 어른들이나 본능으로 활개치는 아가들이 더 편하고 좋았다. 루시 또한 나이 값 착실히 하는 또래들보다 활력을 과시하는 젊은이들을 선호했다. 무엇을 하든 귀엽고 반듯하고 조화로운 것을 고집하는 소녀를 품고 있어 그녀는 늘 밝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유난한 서로의 성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며 쉽사리 마음을 열었다.
루시에겐 네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나보다 두 살이 많은 큰 딸은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사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무원이었던 그녀는 늘 외부에 나가 있었고, 작은 딸과 작은 아들부부도 떨어져 살고 있었음으로 내가 가장 가까이 지내는 딸이 되었다. 그러나 거리가 가깝든 멀든 루시는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고, 함께 하고 싶을 때는 상대방의 상황과 의중을 먼저 물어보았다.
나는 루시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거의 없었다. 거절할 핑계거리가 도무지 없었다.
타이핑을 마친 루시의 편지는 Chat GPT에 의해 수정되고 마무리 되었다. AI에 대해 알지 못하는 루시는 내 영어실력이 완벽 해졌다고 칭찬했다.
완성한 편지를 루시에게 건네주고 그녀가 준 종이백을 열어 보았다. 크리스마스트리와 노란 별이 수 놓인 셔츠, 알록달록한 양말과 예쁜 장식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내게 부탁을 거저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만류해도 꼭 무엇인가로 답례를 했다.
그녀 친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농장과 주택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는 큰 딸이 작은 집 하나를 내 주었을 때도 루시는 먼저 다짐을 받아냈다.
"계산 분명히 하자. 공짜는 절대로 싫다”
그런 다짐과 함께 월세를 밀리거나 건너 뛴 적이 한번도 없는 유난한 자존심의 어머니였다.
그런 그녀가 나의 도움은 더군다나 거저 받을 리가 없었다. 뭐라도 주고받아야 이용하고 이용당한다는 소릴 안 듣는다는 게 그녀의 신념이었다.
생전의 내 한국엄마도 그랬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외상은 소도 잡아 먹는다고, 공짜와 외상은 절대로 경계하라고 훈계했다. 그렇게 두 엄마들은 닮은 게 참 많았다. 우리가 공짜로 받는 선물은 오직 자연이라고 말하는 그들, 신의 선물인 자연을 향유하는 여행이라면 얼마든지 참여하고자 하는 열정까지도 흡사했다.
무엇보다도 빛나는 공통점은 먹은 나이를 잘 소화시키는 것이었다. 늙음을 쇠퇴로 연결하지 않고 최대한의 무르익음으로 숙성 시키는 능력이랄까, 넉넉한 연륜을 쌓아 온 어르신 답게 옛 것을 지키면서도 현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멋스러움이랄까, 뭐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그 엄마들의 딸이니까, 당연히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지. 나이의 소화불량을 일으키지 않는 건강하고 단정한 어른. 느슨하게 풀어놓지 않고 늘 야무지게 여미어, 치매나 노환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어르신, 슬기로운 노년의 나를 연습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