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부영화 속의 마을처럼 자락동은 백인들만 모여 사는 늙은 촌동네다. 겹겹의 두꺼운 숲과 갖가지 기암괴석들이 빼곡하게 어우러져 온통 검게 보이는 블랙힐의 장관은, 자락동이 시작되는 언덕 아래에서 느닷없는 갈색의 초원으로 곤두박질 치며 맥없이 드러누운 평원으로 변모했다. 블랙힐에 너무 심취한 창조주가 그곳에다 모든 재료들을 소진해 버려 어쩔 수 없이 방치한 듯한 아쉬운 궁핍이 고여 있는 평지였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하고 칙칙한 초원에는 걸핏하면 건들거리는 바람 떼가 우르르 몰려와 불량배처럼 와와 휘젓고 다녔다. 바람의 발치에 쓰러진 풀들은 휘잉 힝 소리 내어 울었고 바작바작 속을 태워 누렇게 갈라진 황무지는 풀풀 한숨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여유를 부리며 다가오던 구름의 뭉치들도 성깔 사나운 바람에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물러나며, 신음 같은 으름짱만 놓아보다가 마른 침을 삼키며 멀어져 가곤 했다. 자락동의 바람은 스크린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황야의 무법자들 같았다.
눈도 비도 몸시 빈약하여 건조한 날이 대부분인 이 마을에 오늘처럼 하얗게 눈이 쌓이면 언덕에는 신나는 축제가 벌어졌다. 아이들은 묵혀둔 눈썰매를 찾아 먼지를 털고 언덕 꼭대기에 올라 날개를 달았다. 새가 되어 나르는 아이들의 함성에 언덕은 쑥쑥 높아져 가고, 순도 100 프로의 겨울 소리가 하늘을 빗질하며 세상을 덮었다.
아이들이 쏟아내는 겨울 소리에 집 앞의 눈을 치우던 내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침마다 오르내리던 작은 언덕이 거대한 산봉우리로 솟아올라 반짝이고 있었다. 땟국 없는 순한 마음의 작은 창조주들이 얕은 언덕을 태산으로 높이며 천사들의 나팔수처럼 훨훨 환호하고 있었다. 나도 오빠가 나무로 만들어 준 작은 썰매를 들고 아이들이 만드는 함성의 사다리를 밟으며 꼭대기로 올라갔다. 어깨죽지에 스멀스멀 날개들이 돋아났다.
마당 구석에 쌓아올린 눈 무더기에 눈삽을 푹 찔러 세워놓고 두 손으로 눈을 뭉쳐 두 개의 눈뭉치를 만들었다. 위에 올린 뭉치에 눈 코 입을 새겼다.
겨울 눈물에 젖어 까맣게 빛나는 마른 가지들을 꺾어 숯덩이를 대신한 눈썹을 심었다. 동그란 박하 이파리들을 따서 진한 갈색의 두 눈을 만들고, 자잘한 마른 꽃들이 송알대는 러시안 세이지의 잔가지들로 속눈썹까지 붙여주었다.
홍당무 대신, 화단 테두리를 만들 때 떨어져 나온 빨간 벽돌 조각으로 코를 붙이고, 마른 양귀비꽃 줄기를 구부려 입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 감고 있던 헤어롤을 풀어 머리에 얹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긴 속눈썹의 동그란 갈색 눈망울로 사랑스럽게 미소 짓는 눈소녀가 탄생되었다.
내가 만든 하얀 소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익숙한 듯 낯선 모습이었다. 분명 눈사람이었지만 어릴 적에 만들었던 눈사람들과 다른 모습이었다. 숯 조각 대신 젖은 나무 조각으로 만든 눈썹 때문만은 아니었다. 긴 속눈썹의 동그란 두 눈도 동양적이지 않았지만 하필이면 머리에 얹은 헤어롤이 노란색이어서 금발의 백인소녀가 되어버린 탓 같았다.
“참 나, 백인동네에 눈사람까지 금발의 백인이라니… 난 끝내 자락동의 유일한 아시안, 외톨이 신세구나.”
내가 구시렁거리자 금발의 눈소녀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금발의 백인이야말로 가장 우월한 종족이잖아. 그래서 나를 금발소녀로 만든 거 아니야?”
“웃기네. 세상에 눈사람을 차별하는 덜 떨어진 인간은 없어.”
“암만 그래도, 나는 가장 아름답고 지능이 높은 금발의 백인이야.”
눈소녀가 그렇게 쫑알거릴 때, 빨간 벽돌조각 코가 툭 떨어졌다. 아무래도 돌조각 코는 눈소녀에게 버거운 무게인 모양이었다. 나는 떨어진 빨간 코를 주으며 사과 했다.
“미안… 다음번에는 작은 홍당무로 더 예쁜 코를 붙여 줄게.”
그러나 눈소녀는 사랑스런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괜찮아. 코가 예쁘지 않고 생각하는 뇌가 없어도 백인이면 안전해. 게다가 난 미국보다 크고 높은 먹구름 나라 시민권자거든.”
그 때, 자락동의 짖궂은 바람 무리가 몰려와 소녀의 머리를 거칠게 흩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헤어롤이 떨어져 내리며 양귀비 꽃대로 만든 입술을 건드렸다. 입꼬리가 아래로 처져 내린 눈소녀의 표정은 울상이 되고 말았다. 헤어롤을 주워 들며 내가 말했다.
“울지마. 이건 애당초 네 머리카락이 아니라 노란색 플라스틱일 뿐이야.”
그러나 눈소녀는 여전히 징징거렸다.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금발의 하얀 피부를 가진 우월한 눈사람이길 바래.”
눈소녀 머리에 헤어롤을 얹어 주며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대머리 백인은 우월하지 않다는 거야?"
"음...일단 피부가 희면..." 더듬거리던 소녀의 말투가 헤어롤을 만지며 불현듯 단호해졌다.
"아무튼 난, 대머리가 되는 건 정말 싫어!"
먹구름이 엷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뿌연 비닐 하우스 안에 들어 앉은 것 같았다. 눈소녀의 피부가 촉촉해지며 윤기가 서렸다. 나는 눈소녀의 처진 입꼬리를 위로 향하게 매만져 주며 한껏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의 하얀 피부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사라지게 돼 있어. 땅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햇볕에 증발되기도 하면서..."
그러나 소녀는 헤어롤을 만지며 즐거운 듯 말했다.
"이건 플라스틱이라 녹지도 않고 증발하지도 않아. 사라지지 않는다구."
"그래, 오랫동안 남아있겠지. 잠시 유용하게 쓰이다가, 오래오래 해로운 쓰레기가 되어."
"난 사라지지 않을래. 쓰레기라도 좋아. 금발의 하얀 피부, 우월한 눈사람으로 영원히 남고 싶어."
"사라지는 건 끝이 아니야. 오히려 영원하게 되는 거야."
나는 점점 더 촉촉해지는 눈소녀를 보며 촉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눈은 또 내릴 것이고, 나는 눈사람을 또 만들거야. 그 때 너는 새까만 단추의 까만 눈, 검은 털실의 검은 곱슬머리 소년이 될 수도 있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색깔..."
눈소녀가 내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다른 색깔은 싫어! 깨끗하고 순수한 하얀 피부와 거기 어울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원해! 유색의 눈사람은 싫다구!"
구름을 벗어난 햇살 한 줄기가 눈소녀를 어루만졌다. 햇살이 닿은 소녀의 몸이 반지르르 빛을 발했다.
"색깔로 인간을 차별하는 건 창조주에게 대단히 무례한 짓이야. 왜냐하면..."
나는 조금씩 작아지려는 눈소녀의 어깨를 톡톡 다독여 주었다. 손바닥이 젖었다.
"...창조주 하나님도 금발의 백인이 아니거든.”
말도 차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