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없네, 기쁨 뿐이네

by 해원

자락동에는 눈물이 없다. 마을에 정착한지 7년이 지났지만 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울음은 다만 어린아이들의 본능적 반응이거나 욕구를 표출하는 수단으로만 보였다.

수양 엄마 루시 덕분에 여러 어르신들과 친분을 쌓았던 나는 장례식에도 자주 참석했었다. 그러나 우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죽음이란 으레 슬프고 아쉬워야 하는 게 내 상식이고 도리였다. 더군다나 나를 귀애하고 친절을 베푸시던 분의 죽음 앞에서 맨송맨송 눈물 없는 얼굴을 한다는 건 크게 욕 먹을 짓이었다. 한국의 내 고향에서는 그랬다. 내 안에는 죽음에 대한 슬픔이 본능처럼 배어 있어 장례식에서의 흐느낌과 눈물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미국의 황야에 자리 잡은 카우보이 동네는 달랐다. 이들에게 죽음은 기쁨과 축복으로 보였다. 경쾌한 카우보이 복장과 밝고 아름다운 차림으로 잔치를 벌이는 장례행사는 결혼식에 버금가는 정경이었다. 그곳에 등장한 망자의 사진과 영상들도 미소가 아름다운 것들로 전시되었고, 참석한 조문객들도 함께 미소 짓고 있었다. 나만 제외하고…


우리 고향에도 눈물 없는 죽음이 있기는 했었다. 무병장수 복을 누리다 길지 않은 병치레로 세상을 수월하게 떠난 죽음을 호상이라 하여 슬픔 없이 치르는 초상이었다. 그렇더라도 잔칫집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듯 상주들의 곡소리는 간헐적이나마 계속되었고 방문객들도 짐짓 숙연한 자세로 문상을 했다.

그러나 상주는 ‘아이고 아이고’ 곡을 읊조리면서도 여기저기 둘러보며 관여를 했다.

“아이고, 아이고… 사랑채에 손님 드셨더라… 아이고, 아이고… 귀한 분이니 술상 좀 신경 써서 내 가라… 아니, 전 쪼가리 말고 고기 좀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푸짐하게 담아 내라… 아이고, 아이고…”

어린 시절, 호상이라는 어느 초상집에서 보았던 상주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애틋함 없는 슬픔을 얼굴에 바르고 무게없는 애곡을 하며 이것저것 간섭하던 모양이 어린 내게는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웃으면 안되는 초상집의 예절을 끝까지 지켜냈었다.

때문에 나는 자락동의 초상이 모두 호상인 줄 알았다. 가족들 가까이에서 노년기를 맞고 (이 동네는 가족 친지들이 많다) 위중한 상태에 병원으로 이송되어 평온한 임종을 맞으면 그게 호상이 아니냐 싶었다. 50대 초반의 교회친구가 폐암으로 서둘러 죽음을 맞이하고 결혼 7개월 째의 건장한 청년이 애통한 사고사를 당하기 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샌디는 입원한지 일 주일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 가족들과 동네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그녀를 보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든든한 내 편이었는데. 약자편에 서기 좋아하는 그녀는 어쩌다 마주친 편견에서 늘 내 편에 서 주었는데... 그런 내 편을 잃는다는 건 정말로 애석했다.

우리 교회에서 행사를 치르게 되어 음식 장만과 손님 대접을 거들면서도 찔끔찔끔 눈물을 훔쳐냈다. 그건 결코 호상이랄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내게는 그랬다.

Screenshot 2025-12-30 102257.png 농장과 하나 된 노부부, 등이 굽을수록 영혼은 곧추선다

그 보다 더 안타까운 죽음도 있었다. 결혼 7개월 째인 청년의 사고사였다. 지붕 없는 자동차로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다가 cattle guard: 가축 방지턱을 들이 받았다고 했다. 그 사고 소식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 죽은 젊은이와 가족들을 참 좋아했었다.

재작년에 90을 넘기신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내게 부모님이 되어 주겠다 하시고 늘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그 분들이 운영하는 농장에 행사가 있으면 초대를 하고, 손수 버섯과 산나물을 채취해 주기도 하셨다. 소 낙인 찍기나 거세하기, 소떼 이동 같은 것들은 모두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신기한 농장 행사들이어서 나는 초대를 받지 않아도 즐겨 농장을 방문했다.

사고를 당한 젊은이는 그 노부부의 첫 손주-사위였다. 사고 소식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두 어른의 얼굴이 떠오르며, 어떻게 그 분들을 뵙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나도 이렇게 충격이 큰데, 그 분들은 어떨까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자손의 죽음 앞에서 자해보다 심한 자책을 하시는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물론 한국에서 겪었던 일이다). 당신들이 죄가 많아 생떼 같은 자식을 앞 세웠다 거나, 자식을 앞 세운 늙은이가 무슨 염치로 살겠냐고 비통해 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자식의 죽음을 보는 것은 전생의 업보이거나 현생의 박복함으로 치부하던 어른들이었다. 하물며 결혼 7개월 차의 손주사위를 끔찍한 사고로 보낸 어른들이라면 말 할 나위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장례식을 피하고 일요일 예배당에서야 그 분들을 뵈었다. 그 분들이 보이는 먼 발치에서부터 입술을 실룩대며 콧물을 훌쩍거렸다

“I’m so, sorry…”

울먹이며 할머님(어머니) 가슴에 이마를 묻었다.

“It happens.”
어른은 담담하고 따뜻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누구나 당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야. 우리 모두는 그가 어디에 갔는지 알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그러니 슬퍼하지 마.”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그 담담함이 하도 생경하고 당혹스러워 내 울음이 멎는 순간 심장도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뭐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건 정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생떼 같은 손자를 보낸 노인네들이 보일 수 있는 여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신혼의 남편을 잃은 신부는 더 한층 놀라웠다. 도무지 슬픔을 읽을 수 없는, 조각상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조용히 사람들의 조문을 받았다.

“Stay strong, okay?”

그녀를 토닥여 주면서 또 다시 왈칵 눈물이 솟구쳤지만, 신부도 울지 않는데 내가 우는 건 말도 안된다 속으로 외치며 꿀꺽 울음을 삼켰다.


즐겨 보았던 서부영화 속 인물들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카우보이 남자들은 총질로 눈물을 대신했지만 여자들은 흐느껴 울기도 하고 까무라칠듯 분노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특히 자식이나 남편의 주검에는 피를 토할 듯 비통한 절규도 하지 않았던가? 딱히 기억나는 장면은 없지만, 분명 그런 장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눈물 없는 죽음, 희망이 담긴 장례식은 이 자락동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과 장례식이 슬퍼 눈물을 보이는 나는 자락동 사람이 되기엔 아직도 멀었나 보다.

자락동에는 젊음이 있네: 젊은 카우보이와 젊은 소들, 그리고 해마다 젊어지는 저들의 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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