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바다를 곁에 두고 늘 바라보고 살지만 바다는 애증의 조건을 지닌 특별한 존재이기도 하다. 뙤약볕에 반사되는 한여름의 바다는 무척 뜨겁고 또 한편으론 시원하다. 숲이나 산이 주는 그늘이나 깊은 적막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때로는 먹먹한 가슴에 뻥 뚫리는 시원함을 주기도 하고 폭풍과 함께 거칠게 휘몰아치기도 한다. 그런 바다를 멀리하고 싶지만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그리운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산은 바다와 달리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늘 평온함과 고요함을 주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바다보다 산을 더 가까이하는 것 같다.
바다와 산은 다른 점도 많지만 서로 닮은 점도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는 바닷가나 깊은 산속에서 가볍게 술을 마시기라도 하면 술에 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술을 깨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바닷가에서는 밀려오고 가는 파도의 너울처럼 흔들리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바다에서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술을 마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다에서는 술이 사람을 마실 수도 있는 것일까. 바닷가에는 망부송이나 망부석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처럼 평온한 바다는 갑자기 돌변하여 사납게 변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연유로 바다에서는 잃은 것도 많고 얻는 것도 많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젊은 시절, 어느 날에 또렷한 기억 하나를 주는 곳이다. 태풍이 지나가거나 해일이 몰아치는 소식을 접할 때면 안개와 폭풍 속으로 빠져드는 성산포의 잔상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오래도록 남기도 한다. 대학을 마치고 교직에 들어가니 스카우트 단체를 운영하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인솔해 연합대 활동에 참가한 적이 있다. 여름방학이 임박했던 며칠간 수백 명이 대규모로 제주 탐사에 참가했다. 많은 인원수와 비용 등을 감안해 항공기 대신 여객선을 타고 제주로 향했다. 부산항을 저녁에 출발한 여객선은 망망대해를 건너 아침이 되어 제주항에 도착했다. 대학시절에 한라산 등반을 한 적이 있지만 드넓은 바다는 배를 타고 가는 아이들의 맘을 금세 사로잡았다.
섬은 언제나 바람이 불어 탈이고 바람이 또 희망이 되는 곳이다. 성산포 주변에서 체험활동을 하다가 폭풍을 만났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모두 되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지만 바람은 그치지 않고 여객선도 바다에 뜨지 않았다. 우리는 일정에 없던 1박을 급하게 마련하고, 어떤 숙소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내가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있었던 추억이며 풋풋하고 아련한 기억이다. 그곳에서 함께 인솔했던 타 지역 선생님들과 협력해 아이들을 돌보며 초조한 맘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고 다음날 예정에 없던 항공기를 이용해 모두 무사히 돌아온 기억이 난다. 이처럼 예측이 어렵고 돌발적인 일이 생기는 곳이 바다이고 섬인 것 같다. 그 혼란스러운 일정 속에서 함께 했던 선생님들이 몇몇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선생님 한 분이 내게 파란색 표지가 눈에 선한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집을 선물로 주었다. 예쁜 맘이 담긴 시집은 오래 간직되었던 것 같다.성산포에서 있었던 우연한 일도 일이지만 센스 있는 시집과 그것을 전해준 따뜻한 맘이 어우러져 그리움으로 남게 된 것 같다.
언제나 바다와 가까이하며 살아온 나는 시집 속에 든 이야기들이 가까이에서 들은 것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시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 시집의 내용들은 가슴에 쉽게 와닿는 것 같았다. 성산포라는 곳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아이들을 이동시킨 기억이 오버랩되며 그 후로 성산포는 내게도 그리운 바다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는 가까운 사람에게 시집을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인 것 같다. 유난히 파란색이 돋보였던 표지와 간결한 그림이 바다를 닮았다. 고운 맘이 담긴 시집을 다시 꺼내 들고 몇 번이고 읽다 보니 어느새 성산포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시인이 읊조린 바다의 노래들은 바닷가의 여러 가지 풍경들을 그림으로 잘 묘사하듯내 맘 속으로 옮겨주기도 하였다.
“나는 떼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거나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라는 말들이 바다를 보면 그냥 이해가 된다. 또,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와 같은 읊조림도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이기에 사람이 바다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에서 -
가끔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면 성산포는 이생진이라는 시인의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와 함께 늘 친근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또 수십 년이 흘러가도 성산포와 일출봉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시인이 말했듯이 성산포에서는 고독에 취해도 걱정이 없다. 바다가 바람을 몰고 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성산포에서는 누구든지 고독해져도 된다. 모두가 고독을 씹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는 고독한 사람이 고독을 삼키지는 않는 것 같다. 바람이 노래하며 그 고독도 슬픔도삼키고 가버리기 때문일까.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떠올리며 과거로의 시간여행도 하며 아름다운 사람들도 추억해본다. 지나간 일들이 모두그리움으로 남는다.